Feat. 69 호수 in 페루, 와라즈
사실 남미 여행 준비를 철저히 하지 못 했다.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인지 뭐 그냥 떠나보자- 이런 생각으로 시작했고
그리고 사실대로 얘기하자면, 나는 그렇게 부지런하거나 민첩한 여행자도 아니다.
발길 닿는 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천천히 걷고 머무는 편이다.
그렇게 철저한 정보 없이 시작된 페루, 와라즈 일정
와라즈는 3000m 정도에 위치한 고산도시이다. 긴 남미 여행에서 절대적으로 피할 수 없는 지역,
바로 고산-
그 고산이라는 거다.
도착한 첫날은 하늘과 가까운 와라즈의 풍경에 빠져 여기저기 돌아다니는데,
이상하게 한 시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피로감이 몰려오는 느낌 -
그 순간 아~ 이게 고산지역이라는 거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와라즈에서 빼놓을 수 없는 트래킹 -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트래킹 때문에 와라즈를 찾는다.
그중에서 유명한 것은 69 호수 트래킹, 빙하 트래킹, 그리고 2박 3일 동안 걷는 산타크루즈 트래킹 -
이 정도로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그중에서 나는 일단 먼저 69 호수 트래킹을 해보기로 했다.
그런데 정말 옛 어른들의 말씀은 틀린 게 하나 없다고 69 호수 트래킹은
내게 "모르는 게 약이다"라는 말이 딱이었다.
나는 진정 69 호수가 그렇게 힘들지 상상도 못 하였다.
고산지역에서 산을 탄다는 것이 그렇게 힘든지 모르고 나름 체력 면에서는 자신 있다면 호기 있게
트래킹을 시작했다. 하지만 너무나도 아름다운 평지를 걷고 있는데도 점점 힘들어 오는 고산의 무서움..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평지가 끝나고 시작되는 마의 오르막 구간,
나는 그때 정말 사람이 이러다 죽겠구나, 내가 이렇게 죽는구나.. 별 생각을 다 했다.
주저앉고 싶었고, 내려가고 싶었고 이미 내 몸과 정신은 내 것이 아닌 상태였다.
자연의 거대함 앞에 인간이라는 존재가 이렇게 보잘것없는 존재구나..
이런 생각들로 가득 찬 채 그저 여기서 돌아갈 수 없다는, 가야만 한다는 아주 작은 마음의 소리를 겨우
부여잡고 천근 같던 다리를 슬로모션처럼 한 발자국씩 움직이며 길을 걸었다.
그리고 몇 미터 앞선 길을 가던 여행객들의 감격스러운 탄식 -
그 탄식을 듣고서 흩어져 있던 정신을 겨우 겨우 모으고는 다 왔냐고 물으니, 그들은 눈빛으로 대답했다.
얼른 와서 이 놀라운 자연의 신비를 보라는 그 눈빛 -
말을 듣지 않아도 그 눈빛 하나로 나는 정말 저 깊은 곳에 남아 있는 마지막 힘을 다해 발걸음을 옮겼고
드디어 69 호수는 나의 앞에 그 찬란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게 만난 69 호수는 정말 너무 아름다워서, 설산에 둘러싸여 시리도록 투명한 호수의 그 물 빛을 어떻게
표현할 수 없어서.. 입을 벌린 채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었다.
그리고 거짓말 조금 보태서 죽음을 경험하고 (진정 살아생전 그렇게까지 육체의 고통을 느낀 적은 극히
드물었던 것 같다.) 만난 그 성취감도 한 몫하는 것 같았다.
올라갈 때 너무 힘들어서 잘 보지 못했던 그 아름다운 주위 풍경들이 내려오는 길에,
그제야 천천히 그리고 너무나도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남미에서 와서 처음 만난 와라즈의 혹독했던 고산은 그렇게 우는 아이에게 달콤한 사탕을 주며 달래듯,
나에게 사탕보다 더 달콤한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경의 선물을 주며 나를 어루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