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앉아있는 공간
당신은 어떤 사람에게서 물건을 사고 싶나요?
당신은 어떤 사람과 일하고 싶나요?
원두가 떨어졌다. 인스타그램으로 연락을 했다. 왠지 다른 곳에서 사는 게 내키지 않았다.
혼자만 커피를 마시니 원두가 많이 필요없다. 아버지 몫까지 해도 얼마 안 된다. 응원하고픈 마음에 더 사고 싶다가도 남아 버리는 건 싫었다. 원두 샘플이라도 더 주면, 아까움에 잠들기 어려울 것이다. 조심스레 얼마 안 되는 양을 부탁드렸는데 연락 주었다고 오히려 감사해했다.
배달에는 원두 샘플도, 두 사장님도 있었다. 이름을 보고 맞는 것 같아 인사를 하고 싶어 왔다고. 인터폰 너머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문 앞 복도에서 한참을 얘기했다. 매번 그들의 공간에 들어가 대접받았는데, 반대로 내가 대접을 하고픈 마음이 들었다. 커피는 못 드릴 것 같았다. 들어오라고 했는데 사양했다. 한번 더 권하지 못한 게 아쉬웠다. 카페 오픈이 생각보다 늦어지고 있다고 했다.
쇼핑백에는 원고지 모양 편지지에 가득 타이핑된 편지가 담겨있었다. 언제 이런 편지를 받아봤을까. 와이프에게 긴 편지를 자랑했다. 공간은 없어졌지만 사람은 아직 남았다. 그걸 계속 잡고 싶은 사장님들이 느껴졌다. 희미해지기 전 가게가 열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주변에 좋은 카페는 많았다. 조금만 나가면 정말 많았다. 다만 바로 집 앞에 없었고, 마음 둘 곳이 없었다. 한동안 이곳저곳 기울였다. 더 맛있는 곳을 찾고 있다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는 항상 정곡을 찌른다.
“아빠. 여기 자몽에이드 맛있어. 그런데 원두서점이 가고 싶어.”
맛있는 건 맛있는 거고, 가고 싶은 데를 가고 싶은 거였다.
인스타그램과 택배상자 안 편지로 띄엄띄엄 1년 넘게 연락하던 중, 오픈한다고 연락이 왔다. 새로 오픈한 곳은 차로가나 지하철을 타나 40분은 걸렸다. 커피 한잔 마시러 간다면 멀 수도 있고 친구 만나 개업 축하하러 간다면 가까울 수도 있고.
일요일에 안 한다고 써주었는데, 바보같이 딸아이와 지쳐 쓰러져있는 와이프를 끌고 차도 막히는 일요일에 갔다. 오픈은 보고 오픈시간은 안 봤나 보다. 문은 닫혀있었고, 대신 옆 멋진 대형카페에 들어갔다. 신기한 구조에 사진도 찍고 빵도 먹고 커피와 에이드도 마셨다. 나쁘진 않았지만 즐겁지 않았고, 원래 가려던 데를 못 가서 다른 곳을 갔었다는 추억만 남았다. 사장님은 나중에 이를 알고 가까웠으면 가게 문을 열어줄 수 있었는 데하며 오히려 미안해했다.
그다음 주 싸늘한 날씨에 사장님들은 환한 미소로 반겨주었다. 둘 다 그대로여서 반가웠다. 한 사장님은 그 길던 머리를 잘랐다. 그리고 다시 기르고 있었다.
카페는 크진 않아도 이전보다 3배는 넓어 보였다. 열 자리 정도 바에서 커피 내리는 모습을 마주 볼 수 있었다. 카운터 옆 조그마한 유리병 소품은 이전 가게에도 있던 것이라고 딸아이가 알아봐 모두 놀랬다. 언젠가 책도 팔고 싶다 했었는데, 뒤편 벽 책장에 책이 가득했다. 글이 술술 써질 조그만 책상이 노란 조명으로 데워져 있었다. 괜히 내가 다 뿌듯했다. 이들을 기억하고 있는 나라서.
카페 맞은편은 큰 도로의 방음벽이 서있었다. 육교와 그 벽 너머로 큰 벚꽃나무들이 줄 지어있었다. 좋아하던 이전 풍경을 떠올리게 했다. 외진 곳이라 아직 손님은 많지 않다 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도 아니라고. 여름이 와서 벚꽃이 피면 손님이 조금 늘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멀리까지 온 이전 동네 주민은 우리만이 아니라 했다. 우리 말고도 기억하고 멀리까지 와준 이전 손님들이 너무 감사하다 했다.
뿌듯한 광경을 보다 문득 나에게로 시선이 돌아갔다. 이들이 이만큼 성장하는 동안 나는 무엇을 하였을까? 프로젝트 2개는 끝냈다. 그래서? 나는 내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이 청년들은 안 보이는 곳에서 조금씩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다행히도 사무실 빌딩들이 멀지 않은 동네라 카페는 금세 자리를 잡았다. 근처 대학 동기와 점심을 먹고 커피를 소개해주겠다고 데려갔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 돌아 나왔다. 반가움에 인사는 해주었지만 예전 그대로 ‘앞에 손님이 많아 20분은 기다리셔야 할 것 같아요.’라고 하였다. 점심시간만 사람이 몰리는 것 같은데, 괜히 또 사장님들 영업이 걱정이 되었다.
그러다 1달 후,
"OO님, 같이 일하게 된 ㅁㅁ씨예요. ㅁㅁ씨, 여기 전 카페부터 단골이신 OO이 아버지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다시 2달 후,
"OO님, 이번에 한 명 더 같이 일하게 된 OO님이에요."
“아, 네. 안녕하세요.”
내가 인사를 받는 게 맞는지 어색했지만, 멋쩍게 기분이 좋았다. 되돌아가는 손님들이 많아 점심부터 오후 동안 이분들과 함께 한다고 했다. 5명의 청년들은 하나 같이 인상이 비슷하게 선했다. ‘어떻게 일하는 분들 다 느낌이 비슷하네요?’라고 묻자 사장님이 얘기했다.
“같이 일하게 된 분들 다 이곳 단골손님이셨어요.”
“… 주로 직장인들이나 지나가는 손님들이라, 이전처럼 동네 사람들은 아니었어요. 그래도 예전 하던 대로 한마디 한마디 나누며 장사를 하고 싶었어요. 그렇게 하면서도 이곳에서는 그런 분위기가 안 되겠지 싶었는데, 좀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계속 찾아와 주시는 분들도 있고, 그중에서 함께 일하게 된 분들도 생겼어요.”
“다 사장님들이 좋은 사람이어서 그런 것 같아요.”
좋아하는 공간에서 좋아하는 커피와 경험을 파는 좋은 사람, 그걸 사고 즐기는 좋은 사람. 모두 취향도 성향도 비슷하지 않을까. 그렇게 비슷한 사람들이 여기 모여 추억을 쌓았다. 누군가는 가족을 데려오고, 누군가는 강원도로 이사를 가서도 추억에 다시 오고, 누군가는 여기서 박사 논문을 써 그 논문책을 책장에 꽂아두고, 누군가는 벽에 전시회를 걸었고, 누군가는 여기서 데이트를 했었는데 나중에 아이를 데려왔고, 누군가는 내 옆자리에 앉아있다 맞은편으로 넘어가 커피를 내린다. 이야기는 계속 쌓인다.
나의 이야기는 쌓이고 있는가? 나도 우직하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나도 좋아하는 서비스를 보면, 그 사람들과 함께 일해보고 싶어 진다. 내가 만든 것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한 사람이 있을까? 아니면 나란 사람, 내 생각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을 만들고 있을까? 사람들은 나와 일하고 싶어할까?
그들을 보러 가지만 돌아오는 길엔 이렇게 나를 본다. 그들의 성장에 기분이 좋다가도 나 자신을 씁쓸히 되돌아본다. 방금 맛본 달달한 티라미수와 기분 좋게 쌉싸름한 커피처럼.
두 사장님은 2호점을 내려고 준비 중이다. 이곳은 여기서 만나 일하는 분들에게 맡길 거라 한다. 더 큰 책방 같은 카페를 내기 위해 장소를 찾고 있다 한다. 앞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보기 좋다. 부럽다. 또 반성도 된다. 좀 천천히 반성하게 만들면 좋겠지만 또 그렇지 않은 모습을 보러 가는지도.
지난주 방학을 맞아 딸아이와 방문했다. 최근 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야금야금 뺏아 맛보던 아이는 처음으로 커피를 주문하겠다고 나섰다. 사장님은 7살 아이에게 설명했던 모습 그대로 디카페인 원두의 향을 설명해 주었고, 훌쩍 커버린 아이는 더 진지하게 들었다. 자리로 가져다준 첫 커피를 마시더니 씩씩한 목소리로 ‘맛있어요’라고 대답했다. 딸아이는 친구들과 이곳에 오고 싶다고 사장님께 말했다. 앞으로의 이야기도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