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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일간 Sep 24. 2024

뜨거움 속에서도 서늘함은 나에게 달렸다.

내가 편히 앉지 못한 공간

와이프와 결혼 전까지 순탄하기만 한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기억력이 안 좋은데 선택적으로 기억하기까지 하는 나도 몇 장면은 떠올릴 수 있으니깐. 하지만 그렇게 속상한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결혼하자마자라는 게 더 문제긴 하지만.




신혼여행은 휴양지와 도시 두 곳을 가기로 했다. 휴양지가 너무 비싼 것도 있었고 긴 휴가에 한 곳만 가는 것이 아쉬웠다. 우리가 경유한 도시는 싱가포르이었다. 사실 더워봐야 얼마나 덥겠냐는 생각이었다. 뭐 남자들이 다 그럴 것 같다. 어려서부터 무감각해져야만 하는 연습을 하도 많이 해왔으니깐. 웬만하면 다 그냥 참을만한 거고 그런 거지. 좀 더우면 어떻고 추우면 어떤가.


싱가포르는 훨씬 무척 많이 더웠다. 휴양지도 더웠지만 언제든 물에 들어갈 수 있는 상태에서 더운 것과 거리를 걷는 것은 달랐다. 나 혼자라면 땀 좀 흘리고 티셔츠를 갈아입으면 된다. 근데 이 신혼여행이란 게 참 그랬다. 가족이라고 하기에는 아직은 여자친구에 가깝고, 그런데 여자친구라고 하기에는 그래도 조금 더 편한 그런 사이에서 같이 다니는 것이었다.


싱가포르에 도착했고 택시는 많이 비쌌다. 여행책자로 배운 싱가포르는 서울처럼 대중교통으로 충분히 다닐 수 있을 줄 알았다. 몇 군데 가야 할 곳을 정리를 해놓았는데, 지하철역보다 조금씩 거리들이 있어 불안했지만. 첫날은 그래도 어떻게 잘 넘어갔다. 운이 좋아서 기억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다음날이었다.


와이프는 두리안을 좋아한다. 어린 시절 해외에서 잠깐 살았을 때 두리안을 먹어봤고, 냄새하고 상관없이 그 맛을 엄청 좋아한다고 했다. 세상 열심히 사느라 뭘 좋아하는 게 많지 않은 와이프다. 그래서 찾아봤지만 한국에서는 당시 구할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장사가 안될 것 같아 안 들여왔을지도. 그래서 동남아에 왔으니 나름 서프라이즈로 목적지를 알려주지 않고 두리안 디저트 맛집을 향했다.  


싱가포르는 아무래도 덥다 보니 많은 쇼핑몰들이 잘 이어져있다. 운만 좋다면 그 뜨거움을 모른 채 냉방병을 걱정하며 돌아다닐 수도 있다. 하지만 나답게도 찾은 목적지는 멋진 야외수영장이 딸린 오래된 호텔 같은 건물이었다. 그것도 언덕으로 이어진 공원 안에 있었다. 자리는 멋지게도 그 더운 날씨에 야외수영장 뷰였다. 다시 생각해 보니 와이프를 위한 두리안의 명분뿐 아니고 여행책자에서 본 작은 사진 몇 장이 나를 그곳으로 이끌었던 것 같기도.


지하철을 내려서 한참을 싱가포르 거리를 걸었다. 많은 쇼핑몰들은 우리 길 건너에 있어 그 안의 한기는 상상도 안되었다. 오래된 식당을 둘러싼 공원은 안타깝게도 경사도 심했다. 평지가 분명 많은 도시 같았는데, 참 귀신같게도 이런 곳을 찾았다. 이제 본인도 10년을 봐왔다고 주장하는 딸아이의 표현을 빌리면, 엄마는 너무 더우면 익어가다가 너무 힘들어 울음이 터져버리는 사람이다. 꽤나 정확한 표현이지만 그땐 미처 몰랐다.


물론 나도 더웠다. 많이 더웠고 등도 땀에 흠뻑 젖었다. 하지만 특유의 무감각함에 더해서 좋아하는 두리안 요리를 몰래 먹여 주겠다는 스스로 만든 말도 안 되는 목표에 취해 있었다. 슬쩍 보니 그녀도 똑같이 등이 흠뻑 젖어 있고 얼굴이 이상했다. 그전에 가볍게 다퉜을 때 봤던 얼굴과는 많이 달라 보였다. 많이 심각하게. 언덕 중턱쯤 저 앞에 하얀색 건물이 보이기 시작할 때, 내가 안도감 덕분에 뿌듯함이 치고 올라오려고 할 그때, 올 것이 왔다. 그녀는 폭발하고 말았다.


그녀는 화를 내다 못해 울음을 터트렸다. 날씨를 원흉으로 돌리고 싶었으나 결정한 것은 나였다. 어쩔 줄 몰라하며 좀만 더 가면 된다고 계속 달래 봤다. 하지만 이미 그녀는 이 언덕을 녹일 듯했다. ‘이렇게’, ‘더운데’, ‘신혼여행에’, ‘지금’ ‘이 고생을’, ‘왜’ 등의 단어와 어절이 용암 같은 눈물을 뿜어내는 소리 사이로 들려왔다. 한바탕 뿜어낸 후 이 자리조차도 너무 더우니 조금만 자리를 옮기자는 말이 그래도 그녀를 움직였다.


사실 나름대로 계획과 변명이 있었다. 나는 두리안을 먹어본 적도 없다. 당시의 나는 음식에서 좀 특이한 향만 나도 죄다 못 먹는 편이었다. 당연히 못 먹을 것을 알고 있던 그 두리안 아이스크림과 슈크림을 먹겠다고 이 먼 곳에서 소중한 시간을 쓴 것이다. 별로 좋아하는 것이 없는 사람이 좋다고 감탄하는 그 표정을 보고 싶어서. 계산하지 못했던 것은 이 사람은 더위에 매우 심각하게 약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한입 먹고 포기했고, 와이프는 비싸다고 더 시키지 않았다. 결국 마트에서 두리안을 따로 사먹었다.




잘 잊어버리는 것이 행복하게 인생을 사는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그래서 그 방법을 마치 나의 변명인 듯 열심히 쓴 글도 있다. 변명이 맞다. 나는 그렇게 잊어버리는 정도가 좀 심하기 때문이다.




10년 후, 그 시간만큼 나이를 먹은 딸과 함께 우리는 중국 상하이에 갔다. 상하이도 한 더위 한다. 참 신기하다. 서울이 더울때도 정말 죽을 만큼 덥다 싶은데, 상하이는 다른 더위가 있고 싱가포르는 또 다른 더위가 있다. 상하이는 싱가포르에 가깝다. 습식사우나가 분명 맞는데, 매우 뜨거운 조명이 머리 위에 있는 느낌이다. 여름에는 그 조명을 좀 가려줄 유명한 미세먼지도 없다.


아빠 아빠 아빠 아빠 아빠
얼마나 더 가야 돼? 얼마나 더 가야 돼? 얼마나 더 가야 돼? 얼마나 더 가야 돼?


아이가 끊임없이 불러댄다. 아이는 머리카락 사이 두피마다 땀방울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에 잠시 잊고 있던 그 얼굴이 나타나려 했다. 내 추억의 한 장면인 5년 전 플라타너스 나무그늘 아래 비를 피하며 온 가족이 아이스크림을 먹었던 가게는 미용실로 바뀌어 있었다. 친구와 시원한 커피와 맥주를 마셨던 작은 가게는 문이 닫혀있었다. 혹시나 이럴까 봐 찾아둔 카페 세 곳 중 한 곳은 사진과 달리 앉을자리 따위는 없다시피 했고, 한 군데는 내부 수리 중이었다. 핸드폰으로 다급하게 지도를 열어봤지만 다 그렇듯 이럴 때는 인터넷도 느려진다. 세상이 나를 버린 듯하다. 그리고 그다음 사거리에서 들어간 카페에도 자리는 없었다. 내 온몸에는 더운 땀과 식은 땀이 함께 흘렀다.


지도엔 카페 가보니 옷가게, 꾸역꾸역 같이 다녀주는 고마운 두 여자분들




이런저런 변명 같은 추억들과 이유를 많이 썼지만 사실 나도 안다. 진정 누군가를 위하는 것은 그 사람 입장에서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사람이 원하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을 조합하여 없는 길을 만들려 할 때가 있다. 그 욕심 때문에 원래 목적이 흐려지는 경우도 있는데 말이다. 잘하려 하지만 가끔은 이렇게 위선적이고 욕심을 부리는 때가 있는 것 같아 미안하다. 그리고 그 가끔이 참 오랜 기억으로 남는다. 추억이라 하기엔 반복하고 싶지 않은 그런.



다행히도 온 가족 모두 함께 무사히 돌아왔고, 우리는 몇 달 뒤 한번 더 상하이를 방문했다. 다세포동물이자 영장류로서 아직까진 그 불필요했던 스릴이 현장감 있게 다가왔다. 더 이상은 반복하지 않겠다고 도착하자마자 자랑스레 달라졌음을 선언했다. 어이없어하는 와이프 옆으로 딸아이는 무엇을 깨달았는지 안도의 긴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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