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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일간 Sep 17. 2024

뜨거운 것 보다도 따뜻한 것이 있다.

내가 누웠던 자리

용암이 펄펄 끓는 불구덩이 밖은 차디찬 겨울이라 나갈 수도 없다. 용암과 빙하가 창호지를 두고 마주한다. 허술한 문이라 바람이 샐 곳도 많은데, 열기가 찬바람을 밀어내고 있다. 방에는 벽마다 자개장들이 다른 높이로 서서 내가 누울 공간을 정해줬다. 하나 남은 벽에 붙은 자리는 아궁이 옆이라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자리는 이미 할머니 차지였다. 장판 바닥에 두꺼운 요 이불을 깔고 누웠다. 잠시 효과가 있는 듯했다. 하지만 용암에 녹아내리듯 금세 그 열기를 이불도 머금었다. 덮는 이불까지 그 위에 얹어보지만, 곧 똑같아졌다.


내가 찾은 방법은 딱 하나다. 새우처럼 옆으로 눕고 온몸을 말아 몸이 바닥에 닿는 면적을 최소화한다. 그리고 뒷마루 쪽 문지방 바로 앞, 자개옷장과 자개화장대 사이 약 1미터 조금 안 되는 공간에 타지 않게 새우를 뒤집어가며 두는 것이었다. 그곳이라고 안 뜨거운 것은 아니나, 몇 년 동안 방 전체를 이리저리 떠돌며 이곳이 그나마 시원한 곳임을 알았다. 언젠가부터는 계절과 상관없이 일어나 보면 뒷마루 문을 막고 있었다. 그래서 할머니는 항상 다른 길로 돌아서 화장실을 가셨다.  




몇 년 후 이사 준비하느라 정신없는 어머니 대신 사촌형과 사촌누나가 나를 데리러 왔다. 할머니에게 인사는 어떻게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큰길로 나올 때까지 오랜 벗인 나이 든 강아지가 구슬프게 우는 소리가 들렸다. 5시간이 넘는, 그것도 처음으로 어른도 없는 기차여행이었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누나와 중학생인 형은 시골에서 나를 꺼내준 영웅이었다. 영웅들은 구하는데 그치지 않고, 시원한 바나나우유와 초콜릿과자도 사주었으며, 제로 게임을 하며 순순히 손목도 내주었다. 창가에 비친 누나와 형의 미소가 지나가는 초록색 들판과 마을마다 가득했다. 형과 누나가 잠든 얼굴이 도시 불빛에 비칠 때쯤 기차는 도착했다.


집에 도착하니 나만의 공간이 있었고, 낯선 침대가 있었다. 밤 10시가 넘었지만 서울은 아직 밝았다. 이 시간에도 물건을 살 수 있는 편의점이란 곳도 있었다. 일 년에 몇 번 잡을까 말까 하던 엄마 손을 잡고 밤거리를 나갔다. 아직 여름이었지만, 그 밤의 콘크리트 벽들은 너무 시원했다. 큰 나무들이 가로등에 일렁였다. 편의점에서 시원한 우유 한팩과 시리얼을 샀다. 집에 돌아와 엄마를 마주 보며 먹은 시리얼은 짜릿할 만큼 시원하고 아삭했다. 먹는 순간 평생 못 잊을 기분이란 걸 알았다. 씻고 신성해 보이는 침대 위에 몸을 던졌다. 이불을 아무리 많이 깔고 몸을 던져도 이런 느낌은 아니었는데, 한 뼘 넘게 띄워진 거리에 딱딱함은 잊혔다. 바닥의 온기나 냉기 모두 내 등에 전해지지 않았다. 뜨거운 온기보단 차가운 시원함에 나는 차차 적응해 갔다.




어느 뜨거운 여름날 몸살에 열이 39도를 넘어갔다. 시원하지 않고 너무 추웠다. 엄마 아빠가 많이 바쁜 것은 모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프면 가던 집 앞 소아과에 가서 약을 타왔다. 약을 먹어도 어지러움과 두통, 추위와 떨림은 가시지 않았다. 11살짜리는 수건을 물에 적셔 닦으면 열이 내린다는 걸 알았다. 수건은 얼마 안 되어 금세 녹을 듯 뜨거워졌다. 물에 담가 식혔다 다시 온몸에 연고를 펴 바르듯 발랐다. 한참을 계속 닦았다. 그렇게 반복하다 약이 들었는지, 수건으로 닦은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열이 내린 상태로 그대로 잠이 들었다. 엄마는 늦게 집에 돌아와 윗옷은 벗은 채로 쓰러져 잠들어 있는 걸 보고 한참을 우셨다고 했다. 속상해할까 봐 말을 하진 않았지만, 엄마의 엄마, 나한테는 엄마 같은 할머니가 많이 생각났었다.




비슷한 일이 할머니집에서도 있었다. 커다란 한 장씩 뜯어 쓰는 달력에는 크게 빨간색 숫자가 보였다. 가로등도 꺼진 일요일 시골밤은 가끔 짖는 강아지 소리 외에는 들리는 것도 보이는 것도 없었다. 그것도 한겨울이었다. 내가 아파서인지 아궁이에 장작이 한참 더 들어가 있는 듯했다. 용암보다 더 뜨거운 건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그런데도 추웠다. 이불을 옆으로 치우고 닿기 싫던 그 바닥에 등을 직접 댔다. 몸 위로는 두꺼운 요까지 덮었는데도 몸의 찬 기운이 없어지지 않았다. 끙끙 앓는 소리에 강아지들도 걱정이 들었는지 같이 울었다. 용암과 빙하도 갈랐던 창호문은 유리와 종이 틈, 문과 문지방 사이, 조그맣게 뚫린 구멍까지 곳곳이 밖의 찬바람에 베어졌다. 그리고 내 몸도 베이는듯했다.


똑똑한 강아지들이 인기척을 알아챘는지 빨리 오라고 시끄럽게 짖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아궁이 쪽 벽에 최대한 붙어있던 나는 천천히 문쪽으로 갔다. 곧 방문이 벌컥 열렸다. 간신히 몸을 일으킨 나에게 할머니는 문 밖에서 갈색 유리병과 가루약을 건네셨다. 추운 겨울, 갈색 유리병은 어디서부터 간직했는지 모르는 온기를 아직 가지고 있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문 밖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내 앞에 서계신 할머니는 머리도 헝클어지고 얼굴도 땀에 젖어 보였다. 할머니 뒤 처마에 붙어있는 형광등은 할머니의 후광 같았다. 마치 집 벽과 화장대 위에 놓여있던 교회그림들의 주인공 뒤 하늘에서 구름을 뚫고 내려오는 빛 같았다. 열린 문 밖의 추위도 할머니의 열기를 뚫지 못했다. 그 뜨거움은 평생 다시 느껴보지 못했다. 안도한 강아지들도 조용해진 그때, 나는 그 약을 먹은 것과 함께 그날의 기억은 끝난다.


30년 가까이 지난 기억인데, 아직도 그할머니의 등장신은 그 어떤 영웅의 등장신보다도 감동스럽다. 그리고 마음이 선선해질 때면, 그 시절 그 용암같이 뜨거워 닿기 싫던 그 바닥과 뜨거움보다도 따스했던 할머니가 그리워진다. 




평생 잊지 못할 사랑을 남겨 주셔서 항상 감사해요.

그 뜨거운 온기 잘 전하며 살아갈게요. 그 온기로 가족들 등이 익어버릴지라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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