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앉았었던 공간
회사에 복직하겠다 메일을 보냈다. 현실적인 걱정들이 답장보다 먼저 돌아왔다. 괜히 마음이 물을 반쯤 먹은 스펀지 같다. 떠 있어도 떠있는지 모르겠고 가라앉지도 않는. 어젯밤 아내에게 퉁명스럽게 대답한 게 기억났다. 괜히 미안해졌다. 나가야겠다. 혼자 집에 있어 좋을 리 없는 기분이다. 가다가 아무 곳이나 들어가야지. 버스정류장에서 처음 오는 버스를 탔다.
종점은 덕수궁이다. 버스 경로를 따라 좋아하는 풍경들이 스쳐 지나간다. 그래도 덕수궁을 보는 순간 종점에서 내려야겠다 생각했다.
다른 궁들에 비하면 덕수궁은 초라한 크기다. 하지만 다른 궁보다 나에겐 특별하다. 소나무들과 뻔한 역사책 속 건물들을 지나면 물 빠진 수영장 바닥에 떠있는 듯한 조그마한 분수가 나오는데, 그다음으로 석조전이 있다. 그 건물 측면에 조그마한 계단이 있다. 그 계단을 오르면 적어도 나한테는 마법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유럽의 신전에서나 보일법한 기둥들 사이로 서울의 고층건물들이 보인다. 조금만 눈을 돌리면 가장 오래되었을 건물들이 있고, 그 틈들을 초록색 나무가 메운다. 운이 좋다면 연한 자줏빛의 꽃까지. 시간이 뒤죽박죽이다 못해 멈춰버린 듯한 이곳을 멍하게 바라본다. 현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이어서 좋다.
여기 걸터앉아 기둥에 등을 기대고 있는 것을 좋아했다. 예전에는 무섭게도 난간에 걸터앉았는데, 이제는 쫓아올 경비분 들보다 내가 더 걱정이 많아졌다. 내렸던 비 때문인지 고구마가 먹고 싶다. 등에 닿는 돌기둥의 시원함도 좋다. 이 좋은 곳에 붙일 좋은 이유를 더 찾아본다. 마법 같고 풍경이 좋고 여러 양식의 건물이 섞여있고. 나름 열심히 설명해 본 것 같지만, 제일 중요한 이유는 아니었다.
친구가 함께 남긴 기억이 이 공간이 가진 의미였다.
공부만큼 걱정 없이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한다. 동의한다. 두 번째 입시 시험 준비였지만, 해야 할 일과 가야 할 길이 정해져 있어 걱정이나 스트레스는 없었다. 내 인생과는 상관없는 큰 이벤트가 있었는데, 주위에서 스트레스는 쌓아두지 말고 나가 풀어야 한다고 해서 나도 심각한 척 따라갔다. 별거 아닌 공놀이가 학교를 다니지 않는 나에게도 여름방학을 선물했다. 모두가 짧을 거라 생각하고 시작한 방학은 의외로 길었다. 빨간 옷의 사람들 사이의 돗자리에 책상의자보다 오래 앉아있었다. 그 열기가 다 지나고 날씨가 시원해졌을 무렵, 공부가 아닌 다른 곳에서 고민은 생겼다.
학원 생활을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고, 당연히 말수도 없고 조용했던 나는 익숙하게도 혼자였다. 그건 나뿐이 아닌 듯했는데, 그 분위기가 싫지 않았다. 오히려 공부하기 좋은 환경이라 생각했다. 그래도 인사도 안 하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한 공간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함께 있다 보니 나도 친구란 게 생겼다. 친절하게 대해줬던 몇 명의 얼굴이 떠오른다.
나의 잘못일 수도 있고, 내 기억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어느 날 한 여학생과 관계가 어색해졌고, 그 후 친절하게 대해줬던 친구들이 갑자기 나를 멀리했다. 얼마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직접 만든 노래를 들려주던 친구, 책 이야기를 함께 나누던 친구, 고시원 방을 구경시켜 준 친구, 집에 지하철을 함께 타고 가던 친구들이 사라졌다. 처음엔 기대도 안 했던 따스한 추억들이 갑자기 부정되었다. 그리고 다시금 혼자가 되었다. 처음 그대로였으면 괜찮았을 텐데. 참다가 답답함에 오랜 친구에게 연락했다. 방해하고 싶지 않았지만 비상이었다.
미안하지만 나에게는 행운이게도 친구는 가까이서 같은 공부를 하고 있었다. 부모님 다음으로 오래 시간을 함께한 친구지만, 당시에는 내가 공부를 방해하는 것 같아 연락을 잘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날은 그 친구를 봐야만 할 것 같았다.
친구는 갑자기 보자는 얘기에 이유도 묻지 않고 오후 보충수업을 포기하고 나왔다. 고가다리 밑 철길을 사이에 두고 오랜만에 친구를 보았다. 도시와 어울리지 않는 종소리가 울렸다. 멈추어 서서 지나가는 기차칸들 사이로 친구를 한참 보았다. 울컥했지만 그런 걸 티 내는 나이는 아니었다.
만나서 별말 없이 걸었다. 친구는 원래 말이 없는 친구고, 빈 소리를 채워야 했던 나도 말이 없었다. 걷다 보니 덕수궁 정문에 도착했다. 갈 곳도 없는데 들어가서 구경이나 하자고 했다. 부모님과 와봤던 것 같기도 한데, 기억은 없었다. 입구 우측에서는 서랍마다 고구마를 담은 철통에서 연기가 올랐다. 하얀 종이봉투 가득 군고구마를 들고 들어갔다.
서울다운 흐린 하늘이었다. 낮은 곳의 벤치는 왠지 답답해서 앉기 싫었다. 그나마 높은 자리를 찾다가 지금 보이는 여기 앉았다. 친구는 뒤쪽 기둥에 기대고 서있었다. 대화는 기억이 없다. 아무 말도 안 했을지도. 기둥에 겹친 친구의 덩치가 그날따라 더 두꺼워 보였다. 나를 보지도 않는 특유의 멍한 시선 때문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거기 있어주면 되었다. 보이는 모든 것들이 커져 나를 잡아 삼킬 것 같을 때, 나를 붙잡아 주면 되었다.
멍하니 한참을 쳐다보았고, 맨날 먹으러만 다니던 우리였기에 친구는 고구마를 달라는 뜻으로 이해했다. 고구마를 하나 건네받았다. 묻은 그을음을 피해서 한입 크게 베어 물은 고구마에 목이 메지 않았다. 많이 달았다.
그 자리에 앉아 앞을 바라본다. 분수와 석조건물과 궁궐의 정원이 현대식 고층 건물들과 함께 만들어내는 모습은 역시나 아름답다. 계단 아래 지나가는 외국인에게 여기 뷰를 보여주고 평가를 받아볼까 잠깐 고민한다. 사진도 열심히 찍어본다. 하지만 그럴싸하게 항상 포장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그곳에서 얼마나 내 마음의 온도가 급격하게 변했는지 일지도. 그것도 좋은 쪽으로.
그래서 이곳이 그렇게나 소중했나 보다. 친구가 옆에 없어도 저 기둥에 기대진 그 온기를 내가 기억하기 때문에. 순간 반송된 현실걱정 리스트의 글자크기가 줄어든 느낌이다. 스펀지는 금세 말랐다.
계단에 앉아 그때보단 조금 얇아진 온기를 찾아 연락을 해본다.
“다음 주 언제 가능?”
“아무 때나”
“화”
“오키”
한결같이 미지근해서, 따뜻해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