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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일간 Oct 22. 2024

속이 울렁거려 죽어가는 곳. 살고 싶은 곳.

내가 앉아있던 공간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떨린다. 떨림을 줄이고 싶다. 머리를 기대지 않자니 살짝 뒤로 젖혀진 의자가 머리를 끌어당긴다. 목에 힘을 줘도 속도를 줄일 때마다 머리가 의자에 닿는다. 창가에 기대 본다. 진동이 어깨에서 팔뚝까지 전해진다. 피곤함에 유리창에 머리를 기대니 관자놀이에 구멍이 뚫릴 것 같다.


가만히 멈춰있을 때는 그 나름대로, 빨리 달릴 때는 또 그 나름대로의 진동이 있다. 엔진은 이 큰 버스가 앞으로 튀어가고 싶게 하는데 브레이크는 그 힘을 반대로 억눌러 땅에 붙여둔다. 둘의 싸움은 가장 격렬한 떨림을 만들어낸다. 베이스만 있는 스피커에 앉아 있는 듯하다.


기어가 바뀌면 떨림은 변주를 시작한다. 속도가 빨라지면 떨림은 줄어들고 느려지면 다시 처음의 격렬함으로 돌아간다. 속도를 올리고 줄일 때마다 반복된다. 떨림만으로도 속도를 알 것 같다. 고속도로처럼 빠르게 계속 달릴 수 있다면 낫겠지만, 여기는 가까워도 상습정체구간이다.


몸 전체를 계속 흔들어 뇌와 위장이 섞인다. 핸드폰이라도 잠깐 본다면, 위와 뇌가 가까움을 확인할 수 있다. 어지러움과 구역질이 난다. 바로 화면을 끈다.


진동만으로 이미 정신을 차리기 쉽지 않은데, 한 가지가 더 있다. 버스는 바닥으로부터의 충격을 칙칙 공기소리와 함께 출렁거리며 완화해 준다. 없다면 더 끔찍할 수 있겠지만, 충격 때마다 출렁이는 느낌은 보트에서 느꼈던 파도의 출렁임과 별 다른 게 없다.


출근길이여서인지, 사람이 가득 차서인지, 창문 하나 없이 밀폐되어 그런지,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려 해도 쉽지 않다.


1년 반만의 출근길. 이 버스를 다시 타기 위해 다시 발급받은 내 사원증. 거기에 있는 20대의 몇 안 되는 정장을 입은 나를 본다. 새벽같이 일어나 왕복으로 이 버스를 3시간 가까이 탔던 저 청년을.  






집 주변에는 회사들이 많았다. 그 많은 회사들을 두고 셔틀버스로 1시간 반을 가야 하는 회사에 들어갔다. 나중에 해외 생활을 한다면 도움이 될 것 같다는 핑계로 합격을 가장 빨리 준 이곳으로 미래를 정했다. 회사는 친절하게도 곳곳에 셔틀버스가 있었는데, 제일 가까운 곳은 버스로 10분 거리였고, 막차는 7시 12분이었다.


매일은 셔틀을 타기 위한 전쟁이었다. 6시 조금 넘어 일어나, 대충 준비하고 뛰어나갔다. 여름에는 더워서, 겨울에는 옷이 두꺼워, 항상 땀이 났다. 대부분은 자리가 있었는데, 세상이 날 버린 날엔 그 긴 시간을 서서 갔다. 아예 자리가 없어 보이거나 버스를 놓쳤다면 빠르게 포기했을 거다. 하지만 애매하게 차에 올랐는데 내리지도 못해 서서 간 날이면 아침부터 이미 야근한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앉아서 가면 괜찮았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그때도 뱃멀미 같은 그 떨림과 답답한 공기, 그것들이 합쳐져 몸을 망가뜨리는 느낌은 같았다. 거의 매일 이어졌던 야근은 6시간도 침대에 눕지 못하게 했다. 자다 일어나 씻고 20분간 버스 타고 걷고 다시 앉았다. 제대로 잠이 들겠는가. 피곤해서 잠이 든 경우도 많다. 하지만 딱히 피로가 풀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최악은 눈만 감고 그 먼 길을 눈꺼풀 속에 다 그리는 날이었다.


크게 도움이 안 되는 재능이 있는데, 길을 엄청 잘 기억한다. 모르는 곳에서도 지도만 있으면 쉽게 길을 찾고, 한 번만 가보면 도움 없이도 운전해서 갈 수 있다.


이런 능력이 저주 같았다. 머릿속으로 다 그려졌다. 어디에서 커브를 도는지, 어디에서 위아래로 크게 움직이는지, 한강다리를 올라가고 있는지, 고속도로를 탔는지, 청계산을 지나는지, 톨게이트를 지나는지, 그래서 회사에 다 왔는지.


강변북로를 진입할 때까지만 길을 기억하는 날은 행복했다. 하지만 눈을 감고도 어디인지를 조금씩 더 알아갈수록, 내 머리의 내비게이션이 더 많이 동작할수록 마음은 초조해졌다. 초조함을 모른 채 하지 못하면 잠은 더 달아났다. 잠을 자지 않으면 내 몸이 회복되지 않고 고장 날 것 같았다. 회사 가까이 왔다는 걸 눈감고도 아는 순간, 하루를 이겨낼 자신이 없었다. 분명 잠에 들지 못했지만 눈감은 시간만큼 잤다고 스스로를 속여보려 했다. 몸은 속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날들은 어지러움과 촌스러운 커튼, 그리고 그 커튼을 통과해 밝기 조정에 실패한 눈꺼풀 속 내비게이션으로 시작했다.


버스 속에서 죽어갔다. 그만 타고 싶었다. 그래서 버스가 필요 없는 곳을 지원하여 옮기게 되었다. 물론 버스만은 아니었고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긴 시간 매일 새벽같이 타던 그 버스를 타지 않으려는 이유도 꽤 컸다. 그렇게 앉아 아무것도 못하고 반쯤 누운 채 내장과 뇌가 진동에 풍화되는 그 버스와는 작별했다.


신기하게도 전혀 다른, 하지만 비슷한 공간이 연상된다. 이 버스처럼 죽어가던 공간이.






싱글침대를 절반만 남긴 파란색 침대는 반짝이는 쇠난간을 달고 있다. 아래엔 실뜨기를 하다 만든 듯한 쇠기둥들이 달려있고 그 아래는 주렁주렁 바퀴들이 달려 있다. 누울 줄은 상상도 못 한 곳. 그것도 이렇게 빨리.


인간이라면 아무 생각 없이 할 기본적인 것들, 숨 쉬는 것, 물 마시는 것, 자는 것, 밥 먹는 것, 그 모든 것에 참기 힘든 통증이 따라왔다. 잘 먹고 잘 자야 건강해지겠지만, 이미 나는 잘 수도 먹을 수도 없었다.


적들은 정체를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작은 침으로 대부분 알 수 있다 했는데 나는 아니었다. 결과가 나오길 기다리는 시간만큼 적들은 내 몸속 땅을 더 차지해가고 있었다. 내 몸의 파이프들이 닫혀갔다. 수술이 필요했다. 무서웠지만 방법은 없었다.


수술 날짜까지 하루하루도 쉽지 않았다. 버티기 힘들면 이 병원 저 병원 응급실을 갔다. 먹은 것이 무슨 약인지 주사를 맞고 있는 게 뭔지도 모르고 맞았다. 병원은 정체를 알기 전까지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했다. 그렇게 내 편이 아닌 것 같던 시간도 결국은 지나갔다.


점령된 일부를 떼어내 정체를 확실히 해두어야 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칼을 데어야 했다. 수술 전 필요한 검사가 많았다. 바퀴 달린 침대는 계속해서 어딘가 나를 데려갔다. 검사실, 검사실, 또 다른 검사실. 환자를 빨리 날라야 하니 가벼워야겠지. 큰 병원에서도 요철들은 많았고, 바퀴 진동과 커브길에서의 쏠림은 그대로 전해져 곳곳의 적들을 춤추게 하였다. 조금만 움직여도 조금만 무게가 실려도 아팠다. 죽어갔고, 패배가 가까웠다.


슬픔을 느끼는 것도 힘이 필요했고, 그 조차 없었다. 어떻게든 이 고통이 끝나기를. 눈물도 흐르지 않았고 숨쉬기도 벅찼다.

어떻게 그 순간에 이겨냈을까. 어떻게 버텼을까.


검사실들과 수술실을 내 손을 놓지 않고 아내는 함께했다. 가장 아프고 힘든 순간마다 옆에 있었다.


괜찮을 거라고,

괜찮을 거라고,

조금만 힘내면 괜찮을 거라고.


글썽이며 나한테 하는 말인지 당신 자신한테 하는 말인지 모를 말을 했다. 아파 정신이 없었는데도 그 얼굴을 보니 아픔은 잊히고 시간은 흘렀다. 보호자가 더 함께할 수 없는 곳까지 아내는 내 손을 꼭 잡고 내 눈을 바라봐주었다.


수술날, 치료 시작날 함께했던 사진들. 치료를 시작하며 병실에서 축하한 아내의 작년 생일.






죽어가는 그 버스에서도 아내가 나를 살려주었다.


몰래 사내 연애 하던 시절, 함께 탄 버스는 악몽과 거리가 멀었다. 멀미를 만드는 진동은 내 떨리는 마음에 잊혔다. 가끔 시간이 맞았다는 핑계로 억지로 같은 차를 탔었다. 서로 한쪽씩 이어폰을 꽂고 듣던 10cm. 서로 기대 잠들었던 순간들. 괴로움은 그 순간 다 지워졌다. 마치 수술실에 들어갈 때 내 손을 잡아줬던 때처럼.


지금은 지하철 역에서 15분이면 도착한다. 차도 종종 몰기에 괴로웠던 시간도 별로 없지만, 오랜만에 이 버스를 타니 여러 느낌들이 떠올랐다.


비슷한 멀미,

비슷한 고통,

긴 고통의 시간을 지나 건강해져 출근하는 나,

그리고 다시 비슷한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살아있는 나를 느끼며, 여러 번이나 나를 구해준 아내가 떠오른다.


10년도 넘게 지난 버스에서 찍었던 사진. 흔들린 사진만큼이나 행복했던 순간.






아픈 사람이 하나도 없으면 좋겠지만, 30년 넘게 기도해도 들어지지 않았다. 주변에 이래저래 아픈 사람들이 보인다. 1달 반 동안 다인실에서 지내며 보았던 그 많은 슬픈 이야기들도 아직 생생하다.


당연히 그러길 간절히 원하지만, 나처럼 모두 다 괜찮아질 거라는 생각은 입밖에 내선 안된다는 것, 잘 알고 있다. 나도 예전보다 건강해 보여도 완전히 나았다고 하기에는 아직 4년이나 남았으니.


다만 이 정도는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모두들 곁에는 내 아내처럼 간절히 손을 잡고 응원과 사랑을 보내주는 사람들이 있다고. 그러니 모두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힘내보자고. 그들이 우리의 손에 쥐어주는 힘은 생각보다 강하다고.


그러니 부디 제발 모두들 끝까지 싸워 많이들 이겨내기를.


1년간 괜찮다는 말을 듣고 나오던 길. 이제는 6개월 후에 볼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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