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일, 매일매일 버리며 걷기
어제 묵은 숙소는 트라바델로(Trabadelo)에서 가장 깨끗하다는 사설 알베르게였다. 어느 블로그 에서 보고 일부러 찾아간 곳이었다. 매우 작은 마을이라 수퍼나 레스토랑도 변변치 않았지만, 숙소가 깨끗해 보여 하루를 묵기로 했던 곳이다. 빈대를 목격하기 전까지는 미리 숙소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지 않았었다. 숙소 이름이 적혀 있는 정보지 한장이면 충분했다. 그 숙소가 깨끗한지 더러운지, 서비스는 어떤지 등등 미리 알고 좋은 곳을 찾아갈 거라면 굳이 순례자길을 찾아올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일부러 안좋은 숙소를 찾아갈 필요도 없지만, 모든 걸 다 알아보고 좋은 숙소만을 찾아갈 거라면, 휴양지 같은 편안한 여행지를 찾아가는 편이 낫다. 근데 빈대는 다른 문제다. 불편하거나 더러운 건 괜찮다. 불친절해도 괜찮고 수십명이 한방에 자도 괜찮고 냄새가 나도 괜찮다. 하지만 빈대는 그런 것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빈대에 물리면 계속 걷지 못할 수도 있다. 치료받을 곳도 찾아가야 하고 며칠 쉬어야할 수도 있고, 물린 흉터가 남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 후론, 미리 숙소 정보를 찾아보고 이동한다. 어제 그 숙소도 미리 알아보고 찾아간 곳이었고, 방이며 침대며 모두 깨끗하고 좋았다. 지은지 얼마 안된 건물에 깔끔하게 운영되고 있는 숙소라 안심하고 오늘 밤을 보낼 수 있겠거니 했다. 그런데…
잠이 들었다가 새벽 두세시에 화장실을 가려고 잠을 깼다가 냉장고에 넣어둔 물을 마시러 부엌에 들어서니 벽을 타고 무언가가 기어가고 있었다. 불길한 기분, 아니나 다를까. 빈대였다. 악 소리를 지를뻔 했다. 이 숙소에 저 한마리가 전부일까. 잠이 확 깨고, 다시 내 침낭 속으로 들어가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화장실 거울에 온뭄을 샅샅히 훑어본다. 물린 곳은 없다. 아직…대부분 물린 직후에 알지 못한다고 했다. 일어나서 길을 걷기 시작하면 삼십분 한시간쯤 지나 피가 온몸에 활발히 돌기 시작하면 두드러기처럼 물린 곳이 곳곳에서 올라온다고 했다. 그러니 아직 방심하긴 이르다. 깊고 깊은 한밤중. 다시 잠을 잘 수도, 이대로 길을 나설 수도 없다. 나는 어두운 방에서 짐을 주섬주섬 챙겨 거실로 나와 불을 켜고 침낭을 털고 손전등으로 찬찬히 살핀다. 눈에 띄는 빈대는 없다. 다행히 배낭은 큰 검정 비닐에 넣고 묶어 두어 빈대가 들어가지는 않았을 게다. 새벽 세시. 서너시간 후면 해가 뜰 것이다. 오늘 밤 잠을 자긴 글렀다.
꼬박 밤을 지새고 어스름해질무렵 길을 나섰다. 잠을 제대로 못자 몸의 피로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오늘은 해발 1400미터 갈라시아 지방으로 들어서는 길목에 위치한 마을, 오 세이브로 (O Cebreiro)를 향해 걸을 예정이다. 최근에 지은 큰 공립 순례자 숙소도 있고, 특이한 건축 방식으로 지어진 집들과 성배가 놓여진 성당이 유명해서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 곳이다. 오늘 이 컨디션으로 그곳까지 걸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태양이 너무 뜨거워 티셔츠는 이미 땀으로 다 젖었다. 끝없이 오르고 또 오른다. 나와 뒷서거니 앞서거니 걷던 남성은 웃통을 벗어던지고 자전거를 끌고 힘겹게 산을 오른다. 그늘이 없어 그 자리에 서서 쉬어도 쉬는 것 같지 않다. 날은 덥고 오르막은 끝이 없고, 소똥말똥은 길 여기저기 퍼져 있고, 냄새는 진동하고, 수십마리 똥파리들은 내 얼굴로 달려들고.
잠도 제대로 못잤고, 부르튼 입술은 터져 피가 흐르고, 입안엔 혓바늘이 돋아 따갑고, 항문 근처가 헐어 걸을 때마다 불편하다. 살면서 이렇게 장시간 내 몸을 쓰며 살아본 적이 있던가. 어느정도 적응했다 생각했지만, 역시 내 몸에 무리는 무리인가보다. 한달 동안 물집하나 안 잡혔던 발인데, 오늘 갑자기 새끼 발가락에 물집과 군살이 잡혔다. 물집이 커지면 얼마나 고생스러운지 다른 순례자들을 봐서 잘 안다. 터지고 다시 덧나고 또 터지고를 반복. 게다가 오늘은 남은 일정 중에 가장 힘든 코스. 왜 걷고 있는지를 더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묻지도 않는다. 그저 아침 일찍 일어나서 길을 나서고, 지치면 잠시 앉아 숨을 고르고, 다시 걷는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안도감과 동시에 얼마남지 않았다는 불안감만이 마음 속에 차오른다.
갈라시아 지방에 들어섰다는 표지석이 나온다. 스페인의 서북부에 위치한 갈라시아 지방은 스페인의 자치 지방으로서 아름다운 산세와 해안가, 그리고 독특한 건축양식과 문화를 지니고 있다.
점심 시간도 한참을 더 지나서 오 세이브로에 도착했다. 유명한 마을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북적인다. 관광 온 사람들, 순례자들, 현지 마을 주민들. 크고 깔끔한 순례자 숙소가 있다는 걸 알지만, 순례자 숙소에서 더이상 자고 싶지 않다. 빈대도 빈대지만, 오늘은 혼자 푹 쉬고 싶다. 민박이나 호텔을 찾아봐야겠다. 레스토랑과 민박을 같이 운영하는 집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두군데 들어가서 방까지 둘러 봤지만, 맘에 들지 않는다. 당장이라도 몸을 누위고 쉬고 싶은 마음이지만, 오래된 돌건물, 어둡고 침침한 방에서 자고 싶지 않다. 아무래도 오늘 이곳에 머물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런데 더 걸을 몸 상태도 아니다. 시간도 이미 늦은 오후다. 적어도 6-7킬로는 더 가야 다음 마을이 나올텐데...
가까스로 힘을 내서 동네를 빠져나왔다. 다음 마을에 간다고 더 나은 숙소가 있으리란 법은 없다. 정보지에 보면 아주 작은 마을 같다. 순레자 숙소의 규모도 작고, 그 숙소에서 자지 않더라도 그 마을에 호텔이나 민박이 있을지 없을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북적이는 작은 마을, 맘에 들지 않는 방에서 자고 싶지는 않다. 어제처럼 빈대 걱정에 밤을 지새우고 싶지도 않다. 햇볕이라도 잘 드는 방에서 자고 싶다.
다시 걷는다. 가방은 점점 더 무거워지고 새끼 발가락에 올라온 군살이 점점 더 배겨와 아프다. 얼마나 더 갈 수 있을까. 얼마를 더 걸어야 할까.
갈라시아 지방은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이다. 순례자들도 이곳에 들어서면 자연스레 발걸음이 느려진다는 곳이다. 지대가 높아서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경치는 비할데 없이 아름답다. 피레나 산맥과는 또다른 풍경이다. 몸이 지쳐서이기도 하지만, 경치 구경에 내 발걸음도 느려진다. 천천히 가자. 빨리 간다고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다. 급하게 서두른다고 내 맘에 드는 방이 새로 생길 것도 아니고, 무리해서 걸으면 물집만 커질 뿐이다. 그렇게 맘을 먹고 나니 마음이 평온해진다. 힘들다고 징징대던 마음도 쑥 들어가버렸다. 누가 시켜서 온 것도 아니고, 내 두 발로 걸어온 이 곳에서 불평할 이유가 없다.
다행히 오 세이브로 지나면서는 내리막 길이다.
한참을 그렇게 더 걸어 도착한 작은 마을, Hospital de Condesa가 보인다. 과연 난 이 마을에서 나만의 방을 구해서 어제 못 잔 잠까지 푹 잘 수 있을까. 썰렁한 마을 입구. 왠지 불길한 예감이 밀려온다.
Distance: Trabaldelo – Hospital de condesa (25km)
Time for walking: 7:00 am – 5:00 pm
Stay: 민박
A thing to throw away: 노트 (일기처럼 끄적끄적 거리던 작은 노트를 버렸다. 내용은 노트북으로 옮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