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또한 지나가리라
회복기의 노래
이제
살아가는 일은 무엇일까
물으며 누워 있을 때
얼굴에
햇빛이 내렸다
빛이 지나갈 때까지
눈을 감고 있었다
가만히
이성과 지성을 지닌 우리 인간들은 삶의 의미와 살아야 하는 이유를 끊임없이 생각한다. 마치 아무런 의미와 이유가 없다면 존재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여느 생물들은 그런 걸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을 제외한 동물들은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산다. 인간들의 복잡다단한 삶에 비하면 사뭇 단순한 일상이지만 동물들의 표정은 인간들의 그것보다 늘 맑고 투명하다. 물론 동물들 일상에도 엄연히 위험은 존재한다. 그러나 위험이 도사린다고 해서 두려움에 떨지만은 않는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비정한 야생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매 순간 최선을 다한다. 마치 내일이 없을 것처럼.
식물의 삶은 더욱 간결하다. 마치 속세를 등진 사람처럼 한 구석에 뿌리를 내리고 거기서 평생을 산다. 고행승처럼 빛과 물로만 자족하며 살아간다. 궂은 환경 속에서도 온 힘을 다해 제 안에서 솟아나는 걸 세상으로 밀어 올린다. 식물은 그러나 소유에는 무관심하다. 겨울이 오면 이제껏 이룬 화양연화를 미련 없이 버릴 줄 안다. 자신을 비울 줄 안다. 식물의 내부는 무소유의 행복으로 연등처럼 내내 환하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생존만으로는 만족하지 않는다. 생존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무의미와 공허를 잘 견디지 못한다.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아내야 하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그 의미를 부여잡은 후에야 한동안이라도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세상엔 영원한 것도 불변하는 것도 없다. 우리를 살게 했던 한때의 의미와 이유는 언젠가는 반드시 소멸하고 변질될 것이다. 소중했던 무엇이 사라진 자리에는 의미를 부여한 만큼의 상실의 슬픔과 절망이 자리할 것이다.
한때 전부였던 것을 잃었을 때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이렇게 자문했었나. "이제 / 살아가는 일은 무엇일까". 그래서인지 시어 "이제"에는 단절과 고립 고독과 체념 슬픔과 절망이 느껴진다. '이제'의 사전적 부연설명 또한 "지나간 때와 단절된 느낌을 준다"이니 다분히 의도적인 시어 선택인 듯하다. 그러나 모든 존재와 현상에는 이면이 있듯이 부정적인 "이제" 또한 긍정의 이면을 지니는 게 아닐까. 삶의 이유를 상실하는 순간, 그 이유가 점유했던 소중한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단절되었지만, 언젠가 혹은 조만간 그 단절된 시간도 '지나간 때'가 될 것이니. 그렇게 단절된 시간으로부터 다시 단절된 보다 밝은 "이제"가 도래할 것이므로.
아무리 추워도 겨울은 결국 지나갈 것이고, 지난가을 잎을 다 떨군 나무는 새로이 다가오는 봄의 길목에서 또다시 새순을 밀어 올릴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가 할 일은 인간의 허울을 잠시 벗어놓고 동물처럼 무위도식하기. 혹은 식물이 되어 무위자연하기. 성급히 삶의 다른 이유와 의미를 찾지 않기. 상실의 슬픔을 잊으려 하지 말고 애써 극복하려 하지 말기. 슬프면 그냥 슬퍼하기. 눈물이 나면 엉엉 울기. "이제 /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하고 묻지도 말기. 그렇게 한 때 내 삶의 빛이었던 존재와 사물 들의 그림자가 나를, 당신을 지나가길 "가만히" 기다리기.
그 봄이 오면 지난한 겨울의 울음은 "이제", "회복기의 노래"가 되어 있을 테니.
어느 날 이스라엘의 다윗 왕이 반지 세공사를 불러 "날 위한 반지를 만들되, 거기에 내가 큰 전쟁에서 이겨 환호할 때도 교만하지 않게 하며, 내가 큰 절망에 빠져 낙심할 때 좌절하지 않고 스스로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얻을 수 있는 글귀를 새겨 넣어라!"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반지 세공사는 아름다운 반지를 만들었으나, 빈 공간에 새겨 넣을 글귀로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가 현명하기로 소문난 왕자 솔로몬에게 간곡히 도움을 청한다.
그때 솔로몬 왕자가 알려준 글귀가 바로..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이 글귀를 적어 넣어 왕에게 바치자, 다윗 왕은 흡족해하고 큰 상을 내렸다고 한다.
출처 : https://namu.wiki/w/%EC%9D%B4%EA%B2%83%20%EB%98%90%ED%95%9C%20%EC%A7%80%EB%82%98%EA%B0%80%EB%A6%AC%EB%9D%B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