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

돌아갈 곳이 있다는 사실은 이렇게 돌아와본 후에나 알게 되나 보다

by 희움

몇 년 전, 친구들과 함께 하던 독서모임에서 나누었던 대화 중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 주제가 있다. “힘든 일이 있을 때 누구에게 의지하나요?” 대부분 가족, 친구.. 를 이야기했는데, 나와 다른 친구는 ‘나 자신’이라고 답했었다. 답하면서도 좀 외로운 느낌이 들었긴 했지만, 힘든 일을 결국 해결해낼 수 있는 건 나 자신이기 때문에 나 자신에게 의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가족에게는 힘든 일보단 좋은 일, 자랑스러워할 일만 이야기하지 힘든 걸 뭐하러 이야기하나, 라는 생각으로 살았던 것 같다. 독립한 뒤에는 더더욱 그랬다. 이직이나 해외로 떠날까 하는 큰 고민들도 가족보다 고등학교 친구들에게 먼저 이야기했다가 친구들의 등쌀에 부모님의 조언을 구하기 시작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고, 작년부터야 조금씩 인생에 대한 조급함이나 피어프레셔에서 오는 고민들을 조언을 얻을 겸 조심스레 내비치는 정도가 되었다. 그래도 감정적 의지보다는 조언, 에 가까웠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엄마와 했던 전화통화가 아직도 기억난다. 지하철에서 울면서 통화했던 것 같다.

내가 지금까지 너무 입시도 취업도 남들보다 쉽게 빠르게 해서 이제 와서 넘어지나 봐, 나 실패한거면 어떡해?

엄마는, 인생에 실패가 어디 있어, 우리가 너를 인형으로 생각하는 줄 아니, 그럴 때 의지하라고 가족이 있는 거지, 우리는 항상 너 편이야. 라고 했다.


내 딴에는 나름 또 큰 걱정 중 하나였던 나 퇴사하면 엄마아빠랑 동생 건강보험은 어떡해? 라는 말엔 엄마는 오히려 웃었다. 지역가입자 되면 그거 얼마 좀더 내면 되지, 그게 뭐가 중요해. 제일 안 중요해.


나도 모르게 실패에 대한, 실패를 보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나 보다. 그 통화가 끝나고 마음이 많이 가벼워졌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어도 괜찮다는 안도감이 들어서 다행이었다. 그 뒤로 HR과의 협의, 공고 서치, 포트폴리오 작성, 업계 네트워킹 등으로 눈코 뜰새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면서도 마음이 허할 때나 저녁 먹고 나서 엄마한테 자주 전화를 했다. 엄마는 항상 전화음이 몇 번 울리기도 전에 바로 전화를 받고는 오늘은 뭐 먹었냐고 물어봤다. 지난 주에는 내가 좋아하는 반찬을 잔뜩 싸서 서울 집으로 와줬다. 트레이 한가득 쌓인 락앤락 반찬통들을 하나하나 꺼내면서 이건 너가 좋아하는 배춧국, 이건 샐러드 하며 밝게 이야기하는데 또 왈칵 눈물이 났다. 평소엔 여행 하나만 간다고 해도 사고가 나면 어떡하냐, 지진이 나면 어떡하냐 하며 조마조마하던 엄마인데 오히려 큰 일엔 유달리 의연하고 단단하다.


아직 서류상 퇴사일은 한참 남았지만 기기 반납 전에 며칠간 본가에 있으려 내려왔다. 집은 평화롭고 시원하다. 아빠는 수영 어디서 하는지를 물어보고, 엄마는 뭐가 먹고 싶은지를 물어본다. 아침에 일어나서 샤워하고 아침밥을 먹은 다음에, 아빠랑 커뮤니티 도서관에 가서 나는 이력서를 업데이트하고 아빠는 스페인어 공부를 하고, 점심을 먹으러 집에 올라간다. 다같이 점심을 먹고는 엄마도 같이 내려와서 책을 읽고 공부를 하고 산책을 나간다. 하루는 동생이 인턴하는 회사에서 부당하고 거친 말을 듣고 와서 상처받았는지 표정이 어두웠다. 이야기를 듣고 엄마랑 아빠랑 나랑 한목소리로 며칠 간 분노하고 걱정했다. 우리는 무조건 동생 편이다. 가족 편이다.


신은 용기를 주는 것이 아니라 용기를 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행운을 주는 것이 아니라 행운이 일어날 수 있는 기회를 준다고 한다. 혹시 하느님은 내게 가족을 의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게 아닐까? 가진 걸 잃고 힘이 들어도 의지할 곳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마음을 안정적으로 만들어 준다. 요 며칠간은 오히려 회사에서 인정받고 다양한 관계를 경험했던 작년보다 외롭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사실은 이렇게 돌아와본 후에나 알게 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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