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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라 Jul 17. 2023

밤을 켜다

 나, 밤의 주인이 돌아왔다. 밤이여, 나는 언제나 네가 그리웠지. 먹고사는 동안 한 번도 허락된 적 없던 이 선명한 밤, '진짜 밤'. 나는 저녁의 계단을 뉘엿뉘엿 걸어 올라가 달의 스위치를 켠다. 똑딱. 낮이여, 이제 휴식해도 좋다. 나의 독수공방은 달빛만으로 충분하니. 나는 옅은 미소를 짓고 계단을 내려와 밤의 땅에 '나'라는 단어를 크게 한번 쓴다.


ㄴ ㅏ .


나는 '나'에 은은한 달빛이 천천히 스미는 장면을 바라보며  이상 기복 없는 평정한 고독에 이른다. 혼자구나, 이제 진짜 혼자야. 차단-한 고독이 드리우는 밤. 나는 고독의 은하 속에서 내 고유한 고독을 정제하고 다듬는다. 편안하다. 자유롭다. 도시 노동자로 산다는 건 하루하루 충혈된 눈으로 긴 낮을 지새운다는 것. 


익명의 노동자여, 밤의 상실을 슬퍼해본 적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낭만과 몽상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과로과 피폐에 함몰된 채 악몽과 불면을 해소해 보려는 노력은 한 번도 빠짐없이 무용했다. 아주 얕은 잠이라도 좋으니 제발 조금이라도 핥아먹게 해 달라고, 나는 밤마다 수마에게 얼마나 애원했던가? 하건만 기도는 언제나 무용했고, 눈을 뜨면 목마른 상태로 작열하는 낮을 향해 달려가야 했다. 몰랐다, 수마도 밤에는 잠을 자느라 내 기도를 듣지 못한다는 것. 무엇을 향해 무릎을 접었던가, 가여운 기도의 밤들이여.


밤에 산다는 것은 제 수명을 갉아먹는 일이다. 나는 한 사람의 백수로서 그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낮의 피로와 속세의 염증, 월요일 아침의 지독한 거부감을 떠올려 보자. 그 또한 수명을 갉아먹는 일 아니었던가? 그러므로 낮의 휴식은 실업의 혜택. 나는 낮에도 잠옷을 입고 악몽을 꿈으로써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실업의 자유를 과시한다. 암막 커튼 아래 드러누운 한 명의 게으른 인간! 나는 우주적 무관심 속에서 증오와 절망을 가라앉히며 스스로의 불면에게 조금 관대해진다. 어울리지 않는 셔츠와 스커트, 구두 따위는 잊어버리고 오직 헐렁한 잠옷 안에서 몽실몽실 부유하며, 해질 무렵 대신 해뜰 무렵을 사랑하며,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아, 지금은 밤이야! 


직장인이여, 부디 실업자의 행복을 질투하지 말자. 당신은 당신의 일을 하고 나는 나의 일을 하는 것이니- 누군가에겐 눈 감았다 눈 뜨면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는 어둠과 허무, 고독에 빠져들기에는 너무 바쁜 자들이 깊이 잠든 때에 나는 이곳에 깨어 무연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본다. 무수한 미완성의 문장들을 그림자처럼 드나들며, 오랫동안 바라왔던 온전한 밤을 누린다. 달빛 아래 신비로운 단 한 글자, '나'를 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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