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라 Jul 11. 2023

증오가 연소된 자리에는 투명한 고독이 남고

승리의 폐허 속에서 다시, 고독한 글쓰기를 시작한다. 휴식이란 무엇인가. 먹고사니즘의 부산물인 만성 피로를 회복하는 것, 버킷 리스트를 실현하는 것, 과거의 트라우마에 초연해지는 것…… 이런 것들은 사실 주말이나 휴가 때도 틈틈이 행할 수 있는 일반적인 휴식을 뜻한다. 깊이 절망한 이후, 삶에 투항한 자의 휴식은 다르다. 그것은 휴전을 뜻한다. 전력을 모두 소진해 전쟁을 잠시 멈추기로 한 바로 그 자리에서 조만간 다시 이어질 것을 전제로 하는 기만적인 휴식, 이 얼마나 숨 막히는 정적인가. 나는 망각과 홀가분함이 아닌, 다음 전투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선명히 떠올릴 때에만 진정으로 쉴 수 있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나는 폐관을 자처하며 철저한 안거를 시작했다. 증오에 비하면 고독은 오히려 달콤한 지경이어서, 하마터면 내가 완전히 고독해졌음을 자랑하기 위해 기껏 얻은 소중한 고독을 깨부술 뻔했다. 나는 가까스로 진정하고 고독의 뚜껑을 닫았다. 고독의 밀폐 보관. 고독의 출입 금지. 새로운 증오의 유입이 없는 한동안 과거의 증오는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다음 숙주를 얻지 못한 마지막 증오는 결국, 지금까지의 모든 증오의 십자가가 되어 내면의 광장에서 화형을 당했다. 증오는 마치 연체동물처럼, 사지를 꿈틀거리며, 천천히 죽어나갔다. 화라락! 마침내 증오의 휴식이 시작된 것이다!


증오가 연소되고 나면 투명한 고독이 남는다. 어떤 앰비언트조차 허락되지 않는 내 사각의 방, 나는 희미한 기쁨과 절제된 슬픔 속에서 말없이 종이를 펼친다. 고요한 침묵과 안락한 우울은 나를 시와 몽상의 세계로 이끈다. 쓰기와 읽기 사이의 위태로운 기기묘묘함, 이것이 바로 깊은 절망 이후 가장 안정된 휴식의 상태다. 무한하고 신비로운 무기력 속에서 나는 비로소 삶에 대한 긴장을 일층 내려놓는다. 


사회생활을 버텨내게 한 큰 원동력이 증오였다는 사실은 여지가 없다. 내가 가장 먼저 내려놓은 것이 증오라는 것이 그 증거다. 지금 나에게는 노동의 의무가 없으므로 증오의 연료는 쟁여둘 필요가 없다. 피로에 지친 몸에 각종 방부제를 투여하고 새벽녘까지 거칠게 이력서를 써 본 직장인이라면, 증오의 위력을 실감해 보았으리라. 그렇다, 증오에는 파탄에 빠진 이의 삶을 힘차게 밀어주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사회에서 튕겨져 나와 온유한 휴식을 취하면서, 오로지 나 자신만 증오하면 된다. 이 얼마나 속 편한 일이란 말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