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세 달. 번아웃의 잿더미 속에서 입사 지원은 조금 미루기로 했고, 생활을 옥죄는 극치의 고금리 속에서도 남루한 옷과 잡스러운 음식으로 용하게 버티고 있다. 여름은 바람이 부는 계절이라 했던가.* 이내에 여름의 초입을 걸으며,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존재의 껍데기를 허물처럼 벗어놓았다. 바람은 내 이마에 새겨져 있던 주홍 글씨의 흔적을 조금씩 지워 주었고, 정처 없이 팔랑거리는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감겨주었다.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 불 때, 한 마리 망각의 동물이 되리. 나에게서 빠져나온 내 영혼은, 텅 비어 흔들리는 속을 쓰르르르 쓸고 지나간다. 치가 떨리던 기억이 섬모를 훑는다.
그 때, 절망과 치욕의 중심에서 나를 지킨 건 생존 본능이 일으킨 거대한 오만이 아니었을까. 나는 퇴근 후 지하 사무실에서 지상으로, 세상의 이마 꼭대기로, 야생의 정신을 폭주시키듯 기어 올라가 미친 세상을 굽어보았다. 그리고 조롱했다. 어디 한번 또 때려눕혀 보시지? 그런다고 나가떨어질 것 같으냐? 하루하루 발악하며, 견디며, 박쥐처럼 몸집을 부풀리고 싸웠다. 지면서도 덤볐다. 도시의 뺨대기를 후려치고. 위선의 모가지를 비틀어 버리고자. 세상이 무능한 나를 비웃을 때마다, 세상의 중심부에 나의 수치심을 폭탄처럼 내던졌다. 너희들이 '소심'하다고 여겼던 내 마음속에 얼마나 많은 폭탄이 들어있는지 보여주마.
독수리처럼 용맹하고 뱀처럼 맹독한 문장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밤 화이트 스크린 앞에 앉아 있었던가. 매일 밤이 내 진부한 고독과의 전쟁이었다. 글을 집어던지는 것도 글을 받아 읽는 것도 오직 나였으며, 그것만이 중요했다. 나는 나의 전사였다. 그것은 진정으로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이제 말할 것이다. 나는 이겼노라고. 나는 '지나고 보면 괜찮다'로 시작하는 문장일랑 쓰지 말라던, 살기등등한 과거의 경고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과거의 내 말을 맹신도처럼 지지하며, 과거의 분노를 함부로 수정하지 않는다. 내 마음속깊은 동굴에 웅크리고 있던 과묵하고 비대한 괴물, 오만한 괴물의 힘으로 승리를 쟁취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이렇게 말할 것이다.세상으로부터 함부로 내쳐진 순간, 무시당한 순간, 외면받은 순간, 끝내 무너져내리는 순간에…… 내면으로부터 알 수 없는 오만이 치솟아 오른다면 믿어야 한다고. 그 오만, 옳다고.
세상이 당신을 짓밟으려 하는가? 오만해지자. 상투적인 문장을 쓰자. 우스꽝스러운 광대가 되자. 인생에서 비탄스러운 사건들은 원래 상투적이고 원래 우스꽝스럽다. 세상을 비웃을 마지막 힘이 남아 있는가? 그렇다면 살아남을 수 있다! 어쩌면 자기 오만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는 시대인지도 모른다. 이 하수상한 시대에 열과 성을 다한 어리석은 자라면! 세상은 무조건 틀렸고 나는 무조건 맞다는 오만을 부릴 자격이 있다. 아무도 그 오만을 무너뜨리지 못하며, 무엇도 당신을 지배하지 못한다. 오만은 당신이 두 무릎을 일으키는 그 순간까지 당신을 지탱하다가, 모든 게 천천히 망각되기 시작할 때 복숭아처럼 물렁해질 것이다. 세월처럼. 여름 바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