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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라 May 17. 2023

호모여, 음성 언어를 잊어버려라

퇴사 후, 두 달. 오랫동안 인간이 없는 시간을 기다려왔다. 바야흐로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고 나도 아무에게도 말 걸지 않는 시간. 내게 목소리가 있다는 사실을 모른 척하며 두 달을 보냈다. 퇴화만이 인류가 나아질 수 있는 최후의 진화일 저. 모 - 든 호모여, 음성 언어를 잊어버려라! 침묵에게 모든 것을 돌려주라! 고독과 함께 고독하라!


"뭐 찍고 있어요?"


늙은 행인에게는 미소를.


나는 망량 같은 침묵을 아무렇게나 질질 이끌고 한걸음, 한걸음, 봄날 오후를 소요한다. 원한과 독기가 빠진 내 존재는 물렁물렁해…… 흐물흐물해…… 이대로 몇 번만 더 깜박, 깜박, 점멸에서, 드디어 적멸으로…… 중요한 순간,


웃긴 이야기를 하나 들었지 뭐야. 유명한 정신과 의사들이 그러더래. 번아웃의 완전한 치료법은 퇴사밖에 없다고. 그거야말로 감기에 안 걸리려면 외출 후에 손 잘 씻으라는 거랑 똑같잖아? 정신과 의사들도 나처럼 미친 게 틀림없어. 그들도 지금 SOS를 보내고 있는 거야.


아, 이 세상에는 사라지고 싶은 인간들이 너무 많아서 나같이 아직 제정신이 남아있는 어중이떠중이는 꼼짝없이 순서를 기다려야 하는 걸.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와 이력서를 썼다.


입사 후 포부를 적어주십시오. 신입의 마음으로 돌아가 배우는 자세로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아니, 초장부터 거짓부렁? 게다가 이 나이에 누가 '처음부터 배우겠다'는 사람을 뽑아줘?) 새로운 도전으로 목표를 달성한 경험을 적어주십시오. 지나간 기억은 모두 낡아버려서 뭘 써야 할지. ㅁㄴㅇㄹ 임시저장. 당신의 10년 후 모습과 그 모습을 달성하는 데 있어 회사는 어떤 의미입니까. 장 1년 뒤도 안 보이는데 10년 후는 좀?


나는 시와 에세이를 좋아하는 편이라, '자소설'을 쓰는 건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자소서를 쓸 때는 역시 소설가 지망생들이 더 유리하겠다. 유명한 정신과 의사가 나를 봤다면 이렇게 말해줬겠지. 우리 친구 외출 후에 손을 잘 씻었나요? 왜 이력서를 쓰다가 번아웃이 왔지요? 의사 선생님이 번아웃을 치료하려면 손을 잘 씻으라고 말했어요, 안 했어요?


나는 어느새 말이 많아진 내 존재에 깜짝 놀라며, 세상보다 한 발 앞서 달려가 다시는 나를 찾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바쁜 세상은 나를 보는 둥 마는 둥 속도를 늦추지 않고 그대로 달려 나갔고, 나는 뿌연 먼지를 뒤집어쓴 채 세상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갔네…… 진짜 갔네…….


한바탕 거친 판을 벌여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잠시 깨달음을 얻는다 해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건 깨달음을 향해 가는 길이 아니라, 깨달은 그곳에서 눈을 뜨자마자 다시 이전과 똑같이 밀려오는 악마적인 현실이요, 태무심한 낭길다. 내려놓은 마음으로는 결코 상대할 수 없는. 애쓰지 않고서는 도모할 수 없는. 아, 내려놓음의 속절없음이여. 세상은 어쩌면 10년 후의 어느 언덕 가 있을는지 모르지만, 나는 아직 여기에 있다. 폐허의 먼지 속에 말없이 서서 바쁜 이들이 남기고 간 발자취를 비뚜름히 바라보며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한층 무거운 질문 속에 침잠해 보는 것이다. 10년 후의 세상은 우리에게 좀 더 너그러울까. 부디.


……


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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