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일기#16
3번 주자가 합류했다. 다 같이 잘린다. 하하! 하하하하! 이게 무슨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할. 무슨 처 이런 경우가. 말도 글도 쩍 하니 이어지지가 않는다. 우리들의 마음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모를 정도로 싹둑, 싹둑, 싹둑 잘려버려서, 모든 게 자꾸만 맥락을 잃어버리게 된다. 빌딩숲 사이의 좁다란 보행로를 낙오자처럼 걸으며 '미쳐야 정상인 시대'라는 상투적인 말을 진실로 체감하는데, 한편 그 말의 진의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우리를 신명나게 잘라대는 권력과 자유의 소유자, 저 위의 사람들은 '미쳤다'는 단어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이 시대의 존경받는 탑티어 정상(頂上)인들이기 때문이다.
둥글게 둥글게 둥글게 둥글게
빙글빙글 돌아가며 춤을 춥시다
차례대로 빙글빙글 돌아가며 광무를 추는 밤이었다. 패자들의 마지막 만찬 자리였다. 다들 지방에서 올라온 자취생들이라 밖에서 구워 먹는 고기가 어색할 만큼 오랜만이다. 우리는 우울한 표정으로 윤기가 흐르는 고기를 들고 싹둑, 싹둑, 싹둑 잘랐다. 고기는 맛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배가 불러서 평소만큼 먹지 못했다. 오늘 둥근달이 이토록 꽉 차서 배가 부른 걸까. 먹지 않아도 배부른 마음으로 잘린 자들이 추는 광란의 무도를 멍하니 바라봤다. 누군가 말했다. 자자, 분위기 왜 이렇게 침울해요, 남은 날동안이라도 즐겁게 보냅시다.
손뼉을 치면서 노래를 부르며
랄라랄라 즐거웁게 춤추자
그래요, 그럴까요. 즐거운 일이 하나도 없는데, 아 그래도 손뼉을 치면서 노래를 불러야죠. 랄라랄라, 라라랄라. 춤추는 사람들이 다 마냥 즐거워서만은 아니라는 걸 구경꾼들은 알아야 한다. 울다 울다 우는 게 지겨울 때, 우리는 글도 쓰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춘다. 누구나 삶이라는 무대 위에서 발가벗겨진 광대가 되는 때가 있는 것이다. 우리 미친 것이지? 맞아, 미친 게지. 그것만큼은 틀림없지. 다들 왜 여기 모여 고생이람? 먹고사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인 줄 알았더라면 안 태어났겠지? 키킥, 킥킥. 아니 근데, 저것들이 또 어느 집 자식들 괴롭히려고 채용 공고를 올린 거지?
링가링가링가 링가링가링
링가링가링가 링가링가링
앞으로 꽃길만 걷자며 다 함께 쨍 술잔을 부딪혔다. 구조 조정의 희생자들이 내 뒤를 따라온다. 예상된 일이었다. 가장 먼저 가시밭길을 개척한 1번 주자로서 높이높이 축배를 들었다. 위하여! 우리 앞에 펼쳐질 꽃길을 위하여! 가시밭길에도 꽃은 필 것인가. 글쎄올시다, 얘들아, 열심히 사포질을 해보자꾸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온다더라. 링가링가링 즐거웁게 웃고 웃었다. 아, 그러나 실수였다. 하늘 높이 칙칙폭폭 웃다가 상사의 상사의 상사의 전화를 받아버렸다. 말 한마디로 사람을 자르고 붙일 수 있는 하늘에 계신 그분께 너무도 밝고 행복하게 대답해버렸다. "출근 언제까지니? 다음 주에 얼굴 한번 보자." "네! 알겠습니다!" 미쳤나? 뭐가 좋다고 면접장에서 처음 만난 그날처럼 착하고 예쁘게 대답해 버린 거지?
손에 손을 잡고 모두 다 함께
즐거웁게 뛰어놉시다
어쩔 수 없다. 이미 벌어진 일이다. 기억을 잃으려면, 동시에 정신을 차리려면, 얼른 다시 즐거웁게 빙글빙글 돌아야 한다. 빨리! 더 빨리! 다 함께 절정을 향해 달려가 보자! 늘 그래 왔지 않는가? 하루아침에 마감해라! 야근은 웬만하면 올리지 마라! 저녁은 네 돈으로 사 먹어라! 큭, 초고속 스피드로 춤을 춘다는 것, 너무 익숙하잖아? 차분히 업무를 하던 지난 날들 역시 손에 손을 잡고 광무를 추고 있었던 게지……. 나는 속이 아파서 숙취해소제를 마시고, 술을 마시고, 또 숙취해소제를 마셨다. 내 차례에서 잘릴 줄 알았던 달밤의 무도는 계속 이어졌다. 느닷없이 도시에 출몰한 석기 시대의 야만인들처럼 다 함께 우스꽝스럽게 돌고 도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