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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라 Oct 11. 2023

퇴사의 전야

퇴사일기#17

 마지막 인사에 관해서라면 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쿨한 적 없다. 역마의 인생 속에서 그렇게 많은 것들과 이별하며 살아왔으면서도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는 것이 '이별'이다. 꼭 한 번쯤은 뒤돌아봐야 마음이 놓이고, 꼭 한 번쯤은 이름을 다시 부르고 상대방의 응답을 확인해야 겨우 발걸음을 뗀다. 인생이 만남과 이별의 학교라면 나는 영원한 유급생이자 부진아일 것이다. 집도 사람도 동네도 물건도 '안녕히 계세요' 하고 한번 인사하고 정려하게 돌아서는 일이 나에게는 왜 이렇게 어려운지.


 나는 습관적으로 무언가에 '우리'라는 말을 잘 붙인다. 우리 집, 우리 동네, 우리 회사. 원래 그랬기라도 한 것처럼, 계속 그렇기라도 할 것처럼, 우리 우리 우리. 그 사실을 몇 해 전 다름 아닌 퇴고를 하면서 깨달았다. '우리'를 하나하나 지우며 생각했다. 나 같은 인간은 이래서 더 자주 떠나야 한다고. 주기적으로 여행을 떠나는 일이 이별에 대비하는 일상 훈련인지도 모르겠다고. 


 회사 생활 중에 내가 한 번도 '우리'라는 말을 쓰지 않았을 리 없다. 나는 습관을 잘 못 고치는 사람이다. 돌이켜 보면 나는 바보처럼 웃음을 잘 흘리고 다녔다. 그 버릇 때문에 손해를 적잖이 보고 사는데도 여즉 고치지 못했다. 그렇게, 우리 라고 칭하던 것들이 있었다. 우리 일, 우리 선배, 우리 팀. 돌아오는 것이 굳은 표정이나 황당한 오해뿐일 때에도, 우리 우리 우리. 그 순간들을 다 잊고 있었는데 이제야 기억이 난다. 나는 한때 우리였던 이들에게 진심으로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평범한 인사말들이 자꾸 위장을 뜨끈히 맴돌아서 한동안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안녕히 계세요'를 여러 번 말해야 하는 날들이라 힘이 든다.


 그리고


 드디어 D-day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마지막 출근을 앞둔 밤, 다시 은은한 광기가 차오르고 있다. 이런 걸 회광반조(사람이 죽기 직전에 잠시 온전한 정신이 돌아오는 것)라고 하는 건가. 슬그머니 미치광이 모드가 켜진다. 마지막 출근은 월요일이 되시겠다. 그런데 새벽에 잠에서 깨어 버스에 버스를 타고 회사를 향해 달려가 지겨운 내 자리의 컴퓨터를 켤 생각을 하니, 지금까지 몸부림쳤던 모든 일요일 밤을 다 모아 바락바락 불려놓은 것 같다. 바야흐로 월요일들의 월요일이 다가온다. 출근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시스템 메시지가 뜨겠지. "업무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하루도 파이팅 하세요!" 이 자식들, 업무 시작 안 할 거야! 파이팅 안 할 거거든?


 진정하자, 퇴사의 전야, 마음가짐을 더욱 염결히 할 것! 나는 엄숙한 표정으로 자취방 구석구석을 청소했다. 세상이 또 무엇을 앗아갈지언정 수녀와 사제와 스님과 목사의 마음으로 도를 닦을지어니, 이건 바로 내일의 광기를 벼리는 순수한 열정. 어차피 질 싸움이어도 굴하지 않을 것이다. 매달 통장에 월급 넣어줬다고 내가 개돼지인 줄 알았느냐. 먹고사는 일에 치여서 모멸감 다 잊을 줄 알았더냐. 너희가 아무리 날 잘라도 나는 내 삶에 딱 붙어 있을 거야. 절대 나가떨어지지 않을 거야.


 내일은 원피스를 입고 나가야지. 봄날의 햇살처럼 밝고 따뜻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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