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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라 Oct 11. 2023

하얀 구두는 어디로 갔을까

퇴사일기#19

 구조 조정을 통보받았던 바로 그날이었다. 얘기를 끝내고 내 자리로 돌아왔을 때, 비슷하게 을의 처지에 놓여 있던 후배들이 우르르 다가와 얘기는 잘하고 왔냐고 물었다. 잘릴 거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고, 반쯤은 장난이었다. 나는 차마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후배 한 명이 슬슬 낌새를 눈치채며 낮은 목소리로 "맥주 한잔 하러 가실래요?" 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은 안 되겠어. 극한 상황에서는 으레 본능에 가까운 예감이 나를 지킨다. 술이 들어가면 무슨 사고를 칠지도 모르겠다는, 명확한 감각이 몰려왔다. 후배들이 의자를 끌고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으나 사무실 자리 밑에 놓아두었던 비상용 구두, 윗사람들이 내려왔을 때 예의를 차리거나 윗사람들을 촬영하러 갈 때 신던, 하얀 구두 한 켤레를 꺼내서 단호하게 쓰레기통에 처넣고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하고 밝게 인사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나중에 들어보니, 내가 그렇게 나간 뒤에 분위기가 싸해져서 남은 사람들끼리 아무 말도 못 했다고 한다. 돌아보니 괴기스러운 순간이다. 삶에서 몇 번 그렇게, 나의 또라이 기질이 툭 분출되는 때가 있다.


 그런데 왜 하필 구두였을까. 괜히 구두에다 못된 성질을 부린 거 아닌가. 쓰레기통에 박아버리다니, 무슨 밑도 끝도 없는 충동으로. 사진첩을 뒤져보니 2019년 8월 26일 퇴근길에 찍은 사진이 딱 한 장 있다. 그때는 상암동이었다. 나의 퇴근길을 든든하게 지켜주던 구두, 네 군데 회사를 함께한 구두, 넉살 좋은 아저씨가 깎아준다고 해서 길거리에서 2만 얼마인가 주고 샀던, 그러나 내가 많이 좋아했던 싸구려 하얀 구두. 사진 속 구두는 이런 식으로 버려지리라고는 꿈에도 모른 채 해사한 표정으로 나를 지탱하고 있었다. 그런 구두를 가장 먼저 패대기쳤다. 세상에 소리 내어 욕을 퍼붓는 대신, 말 못 하는 구두를 조용히 집어던졌다. 구두는 내가 무서웠을 것이다. 구두는 나를 미워하고 있을 것이다.


 평소 구두를 잘 신지 않는다. 높은 구두는 사 본 적도 없다. 구두를 잘 신고 다니는 여자들을 보면 예뻐 보이지만, 나는 발목도 아픈 데다 잘못하면 계단에서 넘어질 것 같은 위태로운 느낌이 싫어서 꼭 필요할 때가 아니면 안 신는다. 버리지 않았다면 더 오래 신을 수 있었을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이제 구두를 신고는 어디로도 가지 않겠다는, 아니면 그 어디에도 구두를 신고는 가지 않겠다는 내 마지막 자존심이었을까. 회사 따위를 위해 아끼는 구두를 신는다면 발목을 영영 잘라버리겠다는 선언 같은 것이었을까. 구두는 책상 밑에서 오직 나만 기다리다가 나에 의해 버려졌다. 구두에게 나는 갑이었을까. 값싸게 사서 함부로 쓰다 버리는 갑이었을까. 구두는 혼자서 걸어갔을까. 멀리멀리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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