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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라 Oct 11. 2023

나는 PD였다

퇴사일기#20

 순간을 영원으로 바꾸는 일이 내 직업이었다. 당신의 삶에서 빛나는 순간, 돌아가고 싶은 순간, 오래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가장 화려하게 요약하는 것은 이 직업의 기본기였다. 나는 박제해야 할 장면을 실시간으로 선택하고, 깎고, 다듬어 영상 언어로 변환했다. 나는 아름다움의 판사이자 시간의 조각가이기도 했다. 나는 순간과 영원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갔다. 당신이 미래에 간직할 단 하나의 장면을 위해.


 순간을 영원히 잊게 하는 것이 내 직업이었다. 당신이 지워버리고 싶은 순간, 매끄럽지 않은 순간, 아프고 쏠리는 순간을 덜어내고 삭제했다. 나는 시간과 시간 사이를 과감히 자르고, 걷어내고, 지혈하고, 흉터가 남지 않게 봉합했다. 나는 상처 난 시간의 외과 의사이기도 했다. 나는 정밀한 작업을 위해 '프레임'이라는 섬세한 단위로 시간의 환부를 들여다보았다. 눈 깜빡이는 동안 흘러가는 찰나도 결코 놓치지 않았다. 어떤 순간을 영원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어떤 순간을 영원히 잊어야만 했다. 


 나에게는 여러 도구가 있었다.

 Rec. 시간을 수집하고

 Cut. 자르고

 Edit. 수정했다

 Stretch. 속도를 늘이거나 줄이고

 Zoom. 확대해 봤으며

 Hand. 때론 수작업했다


 뿐만 아니라

 Opacity. 기억의 농도를 조절하고

 Anchor Point. 마음의 중심점을 잡고

 Blend Mode. 시간과 시간을 뒤섞거나 겹치기도 했다


 나는 이 모든 도구를 내 몸에 체화했다. 내 손가락 끝에는 언제나 단축키의 알파벳이 붙어 있었고, 그 부분까지도 모두 내 손가락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현실을 앞에 두고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편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세히 보고 싶은 순간에 Slow Motion을 걸 수도, 듣기 싫은 소리를 Mute 시킬 수도 있었다. 나는 세상을 실시간으로 편집하며 살았다. 과거, 현재, 미래에 동시다발적으로 살았다. 내가 사는 세상은 고독했으나 무한하고 자유로웠다. 그 속에서는 모든 꿈이 현실이었고, 모든 현실이 꿈이었으며, 모든 아름다움이 옳았다. 내 삶에서 의미 있는 모든 이미지와 텍스트가 바로 거기, 낡고 오래된 모니터 안에 다 있었다.


 나는 여행가였다. 나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무리를 양떼처럼 이끌고 온 세상을 여행했다. 시간의 행렬은 내 단순한 가이드를 따랐다. 나는 다가오는 시간에 Start를, 흘러간 시간에 Cut를, 완결된 시간에 OK를, 되돌리고 싶은 시간에 NG를 외쳤다. 미래가 선두에 설 때도 있었고, 과거가 하루의 끝에서 기다리기도 했다. 나는 시간의 양치기이기도 했다. 뒤죽박죽으로 걸어 다녔지만 누구도 우리의 행진을 막지 않았다. 완벽하지 않아도 OK였다.


 나는 제빵사였다. 시간은 밀가루 반죽이었고, 매일 시간을 조물조물 반죽하는 것이 내 일이었다. 그러면 시간은 숙성되었고, 발효되었고, 탕종식빵처럼 부드러워졌다. 나의 사명은 그날그날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식빵을 구워내는 것이었으리라. 어쩌면 나는 당신이 원하는 모든 장면을 만들어 내는 신비로운 빵집의 주인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내가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은 엉망진창으로 뒤엉킨 내 삶을 편집하는 일이다. 나는 내가 시간의 연금술사이고 판사이고 조각가이고 예언가이고 외과 의사이고 여행가이고 양치기이고 지휘자이고 제빵사였던 모든 시간을 삭제하려 한다. 시간의 가위를 클릭한다. 무엇을 위한 삶이었나…… 그 어떤 시간도 나를 삭제하려는 나를 몰아낼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선택한 이 모든 직업, 나 깊이 사랑했노라…… 손가락 끝부터 자를 것이다. 나는 숙련된 시간의 기술자이므로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아플 것이다. 그래도 아물 것이다. 하여 언젠가 더러운 추억들이 쓸려나가고 순수한 마음만 단 한 장의 사진으로 남을 그곳에서, 말할 것이다, 오래전 내 직업은 PD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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