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라 Oct 11. 2023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백수 인터뷰

퇴사일기#21

Q. 오늘은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백수 인터뷰를 해보겠습니다. 무지렁이 백수도 인터뷰의 대상이 될 권리는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A. (시큰둥)


Q. 아니, 두 달 전 울고불고하던 사람 맞습니까? 사람이 이렇게 변해요?

A. 지금 나한테 시비 거는 겁니까?


Q. 흠흠, 아닙니다. (거, 백수가 성질 있네.) 백수가 된 기분은 좀 어떠신가요?

A. 뭐(귀찮), 이제 한 달 반쯤 됐는데요. 이제야 정말 실감이 납니다. 한동안 '잘렸다'는 자의식이 너무 컸거든요.


Q. 특히 언제 실감이 나나요?  

A. 아무래도 남들 출퇴근하느라 어깨에 바짝 힘 들어가 있는데, 통 크게 시간 펑펑 쓰면서 허세 부릴 때죠. 지옥철 퇴근시간에 호젓한 뒷동산에 앉아서 시 몇 수 읽다가 멍하니 노을 지는 거 보고 있으면 그렇게 짜릿합니다.


Q. 대낮에 동네에서 털레털레 걸어 다니는 거 본 거 같은데요, 혹시 본인 맞으신지?

A. 앗, 못 본 척해주시기 바랍니다. 그게 바로 백수의 특권 아니겠습니까? 놀라운 것은 그 시간에 저처럼 심심한 표정으로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아주 많더라는 거예요. 그 사람들은 다 뭘까요? 너무 궁금하더라고요. 저 혹시 너도 백수신가요…… 하고 물어봤다가는 뺨 맞겠죠?


Q. 옷을 잘 안 갈아입으신다던데?

A. 예리하신데요? 네, 퇴사 후 추리닝 두 벌 돌려 입으며 살고 있습니다. 자꾸 백수 백수 하시는데, 사실은 두벌 신사라 할 수 있지요. 중요한 건 '신사'라는 말입니다. 마침 내일 약속이 있어서 나가야 하는데 고민입니다. 마지막 외출이 겨울옷인데…… 오월에 코트는 좀 신사답지 못할까요? (저 추위 많이 탑니다.)


Q. 밥은 먹고 다닙니까?

A. 직장인일 때 새벽 루틴이 있었는데요. 일찍 도착해서 김밥 한 줄과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신 뒤 망망창천에다 파이팅 한번 외치고 지하 사무실로 내려가는 거였어요. 다른 건 모르겠고 김밥 없는 삶은 좀 허전합니다. 아, 밥 얘기를 하니까 갑자기 김밥 생각이 나서 그래요.


Q. 짠하네요. 그럼 마지막 외식은 언젭니까?

A. 얼마 전 친한 선배가 "요즘도 퇴근 늦게 하냐?"라고 묻더군요. 그래서 "아니요."라고 대답했죠. 선배가 "웬일이야?" 하시기에, "퇴근을 안 하니까요." 장난 좀 쳤죠. 당연히 연속 반응으로 "퇴근을 왜 안 해?" 셨고, 백수다운 심드렁함을 살짝 보여주며 "출근을 안 하니까요."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선배가 눈이 휘둥그래져서는 "출근을 왜 안 해?" 물으시는 거예요. 그래서 별 거 아니라는 듯이 알려드렸지요. "잘렸으니까요." 그날 선배한테 소고기 얻어먹었습니다. 그게 벌써 3주 전이네요.


Q. 맨날 집에서 안 나가고 뭐 합니까? 

A. 그 선배랑 똑같은 말을 하시네요. 선배한테는 '자아 실현'하고 있다고 했는데, "자아 실현은 무슨 자아 실현!(부산 사투리로)" 하면서 한소리 하시더군요. 근데 집에서 안 나가니까 너무 좋습니다. 코로나도 아닌데 자체 격리 100점이에요. 제가 자체 격리를 하고 있다는 데 아무도 관심이 없다는 점에서 완벽합니다. 인간의 언어를 잊어가고 있어요. 몽상과 망상의 잠옷을 입고 귀신처럼 얼쩡거리며 삽니다. 주기적으로 날아오는 각종 요금 청구서만이 제가 아직 이 세상에 살아 있다는 느낌을 주죠.


Q. 제정신입니까?

A. 그럴 리가요.


Q. 언제까지 백수로 지내실 예정인가요?

A. 제가 여름을 싫어해요. 추위도 많이 타는데, 더위는 더 많이 타는 피곤한 사람이에요. 일단 여름까지는 백수로 버텨 볼까 합니다. 사실 저 아무 생각이 없어요. 혹시 올여름 백수랑 같이 수박 드실 분?


Q. 수박 비싸요. 백수가 사 먹긴 좀 그렇죠. 그래도 입사 지원은 좀 해 보셔야죠.

A. 냉정도 하셔라. 저도 알아요. 안 그래도 실업급여 때문에 채용공고 사이트 열어봤는데, 토할 것 같았어요. 와! 그냥 너무 싫어요! 저 채용공고 알러지 생긴 거 같아요. (그래도 지하실에서 일하면서 생긴 아토피가 좀 괜찮아진 거 있죠?)


Q. 글쓰기는 잘 돼 가세요?

A. 힘들어요. 전세사기 이야기 쓰면서 싸움 기록 읽고 듣다 보니 현타 오더라고요. 정리할 글도 많고 읽을 글도 많아서 마음만 바빠요. 근데 누구신데 자꾸 저에 대해서 질문하시는 거죠?


Q. 날 잊어버렸어요?

A. 네? 누구시더라…….


Q. 나는 당신의 과거.

A. 미안해요, 나는 당신 편이에요. 영원히.


Q. 나는 당신의 미래.

A. 나는 늘 당신이 궁금했어요. 당신 지금 어디 있어요?


Q. 나는 당신의 잊자, 나는 당신의 내려놓자, 나는 당신의 괜찮아.

A. 잊기로 한 거, 잊어버렸어요. 내려놓기로 한 거, 내려놨어요. 괜찮기로 한 거, 괜찮기로 했어요.


Q. '지금, 여기'에 속지 마세요. 그건 당신 인생의 역사. 인생은 이어지는 것.

A. '지금, 여기'는 나의 은둔처. 이곳 말고는 갈 곳이 없는걸요. 창피해요.


Q. 우린 또 만날 거예요. 당신이 글을 쓰는 한.

A. 우리 계속 얘기해요.


Q. 나는 당신 편.

A. 나는 당신 편.

이전 21화 나는 PD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