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겨울보다 더 추운 봄이었습니다. 봄꽃의 릴레이 축제에 추호도 동참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꽃 같은 거, 폈다가 지라지? 그러던 어느 밤 쓰레기장에서 봤던 목련 한 그루, 봄의 폐장 속에서 뒤늦게 봉오리를 꿈틀대던 그 하얀 생명은, 우주의 모든 봄을 끌어다가 제 주머니에 넣어주더군요. 결락된 존재를 뒤돌아 봐주던 몸짓, 시선, 그리고 꽃그늘. 저는 그 아래 한참이고 서 있었지요.
여름, 절망과 불면 속에 헝클어져 술만 마셨습니다. 극단적으로 내향적인 절망은 약간의 자폐증과 실어증을 동반한 채 자신과 함께 저를, 차곡차곡, 밀폐하고 있었습니다. 때때로 절망에게 옷을 입히고 밖으로 나가보았으나, 또다시 헤어지는 순간들은 얄궂고 허무하기만 했습니다. 그때, 돌아서도 돌아서지 않는 것들이 있다고 내게 알려주던 당신. '아조 섭섭치는' 말라고(서정주,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中) 자분자분 말해주던 당신. 덕분에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한 문장 한 문장 밞아 내어 살았습니다.
가을, 그때야말로 죽고 싶었던 겁니다. 제가 가장 사랑하는 계절이었으니까요. 사랑은 사람을 망치며, 사랑은 자기 파괴 욕구이며, 사랑은 가장 인간적인 방식으로 인간을 끝장낸다…… 사랑이야말로 좌절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행위이며, 사랑이야말로 파멸의 오랜 지지자이다…… 저는 아무 거리에나서서 테러하듯 메모했고, 소용없는 메모를 아귀아귀 재독하느라 모든 힘을 소진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이 저의 고백이자 기도였습니다. 살의로써 살아낸 계절이었습니다. 그게 최선이자 차선이며 차악이었습니다. 죽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면 저는 아마 단 한 걸음도 걷지 못했을 겁니다. 이런 제가 감히, 다음에도, 가을을 좋아할 수 있을까요…….
겨울, 외투를 꼭꼭 잠가도 무언가 헐겁습니다. 떠날 예정이었던 것은 모두 떠났습니다. 귀신이 되어버린 느낌입니다. 하루 같은 일 년이 저물었습니다. 야윈 태양이 속삭입니다. '이제 가야 할 시간이야.' 그러나 뒤돌아 봅니다. 한 번만 더. 지난 계절이 부려다 놓은 기억들을 응시합니다. 수굿한 풍경들을 소랑소랑 끌어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막차를놓쳤습니다. 괜찮습니다. 어쩌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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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동안 서툴고 모난 글을 읽어주시고 따스한 말을 건네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올해 브런치를 통해 많은 분들을 알게 되고 과분한 응원을 받았습니다. 친구가 되어주겠다 하시고, 같이 울어주시고, 같이 욕도 해주시고…… 내내 저 외롭고 서러운 글만 썼지만, 각각의 계절로 다가와 주신 많은 분들 덕분에 울음을 그치고 난 뒤의 제 마음에는 작은 풀꽃이 피었답니다.
사실 저는요, 스쳐 지나는 모든 것들을 끙끙 사랑하며 살았습니다. 압니다, 언제나 잘 사랑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걸요. 갈망하기만 하다가 끝나기도 한다는 걸요. 무참하게 내동댕이쳐지기도 한다는 걸요. 그래도 멈춰지지가 않았습니다. 저는 사랑이 너무 과한 사람이었던 거예요. 그런데, 사랑이 적당한 사람도 있나요?
여기저기 잡다한 원고를 디밀어 보았으나, 이렇다 할 성과는 얻지 못했네요. 그래도 저는 애써 기록하며 살아가려 합니다. 일기와 편지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장르라는 것을, 글쓰기와 책읽기는 그 모든 것 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라는 것을, 올해에는 정말로 알게 되었거든요.
하루하루 또 살아내야겠지요. 끝까지 살아야겠습니다. 보다 잘 귀 기울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차라리 유심해져도 괜찮은 순간들을 더 많이 만들고 싶습니다. 말로 다해질 수 없는 마음, 이란 것을 계속 쓰게 될 것 같습니다. 모두 새해 복 함빡 받으세요.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