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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라 Jan 09. 2024

얼어라, 순간

#07


 눈이 펄펄거리다 못해 쩌락쩌락 내리던 밤이었습니다. 절정. 계절의 절정이다, 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순간. 환하고, 서늘하고…… 따뜻한. 절정은 무에든지 열정을 품고 있는 것 같아요. 한겨울조차도 말예요. '윈터 블러썸'이야, 혼자 조용히 이름 붙여 보았습니다. 그 단어로 시를 쓴다면 차가운 색으로 써야 할지, 따뜻한 색으로 써야 할지. 손등을 훑고 가혼몽의 감각 느끼면서.


 모든 것은 순간이라지요. 헌데 절정이라는 생각에 미치는 순간, 이제 내려갈 일만 남았나, 싶어 퍼뜩 서러워지더랍니다. "이제 내려갈 일만 남았잖아요." 하고 60대 선배에게 무덤덤 웃으며 말하던, 50대 선배의 얼굴이 생각났습니다. 절정 다음에는 내려가는 일을 하는 거라고, 어중중 배웠습니다. 아, 쓸쓸한 아기 같던 사람들, 좋았어요. 좋아했었어요.


 달력을 헤아려 보니, 밤이 연중 가장 긴 때라는 '동지'도, 겨울 중 가장 추운 때라는 '소한'도, 이미 지났더군요. 빠르기도 하지요. 또 나만 빼고 다들 봄을 준비하고 있는 걸까요? 오랜 파착의 버릇이 일어, 계절을 보내기 싫어지더군요. 언제부터 이 계절이 내 것이었다고요. 계절의 속도에 맞추어 마음을 탈탈 터는 일은 여전히 어렵기만 하여요. 저는 언제까지 철 모를라구 이럴까요, 또 뒤늦게 밀린 환절을 겪느라 허리를 휘청대고 있겠지요.


 두 명의 친구와 통화를 했는데요, 한 친구는 눈이 슈가 파우더처럼 하얗게 쏟아져기뻤대요. 그래서 저는 말했지요. 그러니까 말야, 하도 포실포실하게 내리니까 어이가 없어서 그냥 막 좋더라니까? 또 다른 친구는요, 일 끝나고 밖으로 나와 보니 가로등 아래 눈이 눈이, 앞도 안 보이게 퍼부어서, 그만 슬퍼졌대요. 자전거를 끌고 울면서 집까지 걸어갔대요. 그래서 저도 말했지요. 러니까 말야, 눈이 어쩜 그리 무지막지하게도 내렸다니. 대단도 하더라. 사람 마음도 모르고.


 친구가 기쁘하니 기뻤고, 친구가 슬프다 하니 슬펐어요. 겨울 나뭇가지에 매달린 이파리처럼, 뎅그렁 뎅그렁 흔들렸습니다. 당신이 살라 하면 살고, 당신이 죽으라 하면, 죽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고장 난 가로등이 깜박거리고 있었습니다. 기쁨으로 한 걸음, 슬픔으로 한 걸음, 점멸하는 마음으로, 박, 깜박…… 가로등은 끝내 꺼지지 않아 저를 집으로 돌려보내더군요. 내일이 별로 기대되지 않는 마음이어서, 사진만 몇 장 찍었습니다. 얼어라, 순간, Freeze frame!


 영상 편집에서는 한 프레임을 캡처하는 것을 'Freeze frame'이라고도 부른답니다. 순간을 얼리는 기분이었던 것 같아요, 멈추게 한다는 건. 더 이상 현실이 아니지만, 때로는 현실보다 더 생기 있는, 이상한 응고, 기이한 윈터 블러썸. 그 속으로 도망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내일이 혹시 봄일까 봐, 그때 갑자기 가로등이 텅 하고 꺼져버릴까 봐…… 저는 거기 서서, 계절의 절정을, 자꾸자꾸 얼리고 있었던 거예요.


 세상은 움직이는 영상이지만, 제 눈에는 순간순간이 멈추어 있는 사진으로 보입니다. 시간을 몇백 분의 일, 몇만 분의 일로 소분할 수 있다면 어떤 부분을 잘라서 보관해 두시겠습니까. 눈이 와서 기뻤습니까. 슬펐습니까. 당신도 얼려 두고 싶은 구간이 있었습니까. 쓸쓸한 당신. 아기 당신.


 모르겠습니다, 제가 또 언제 카메라 배터리를 충전해 두었는지. 얼리다 얼리다 스스로 얼어버린 듯, 거리에 서  사람은 누구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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