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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라 Dec 14. 2023

비가 와, 꽃이 펴

#05

 언니, 십이월인데 자꾸 비가 와. 왜 이렇게 자꾸 비가 오는가 했더니, 기후 변화 때문에 지구가 따뜻해져서 눈이 녹아 비가 돼 버린 거래. 우리가 보고 있는 저 비는 원래 눈이었던 거야. 이상하지, 어느 경계에서 기쁨이 슬픔이 된다는 건. 길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걸 들었어. 겨울이 미쳐버려서 비를 뿌린다고. 사람들은 눈을 기다리는 걸까? 살 에는 추위를? 그치만 추워지면 또 따뜻해졌으면 좋겠다, 하고 말할 거잖아.


 나 사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바로 뒤에서 몰래 주문을 적 있었어. 안 따뜻해졌으면 좋겠다, 계속 추웠으면 좋겠다…… 혹시라도 신이 들었다면 기도가 좀 상쇄됐으면 하고. 사람들을 미워하거나 질투해서는 아니었어. 겨울에 불었던 달콤한 바람 때문이었어.


 사실은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사나운 설풍이었어. 눈보라 속에서 우산을 놓쳐버리고 그걸 찾으러 가느라 손발이 파랗게 젖어버렸지. 그래도 좋았어. 그때 나는 사기꾼들과의 지리한 싸움을 겨우 끝냈고, 코로나와 독감을 연속으로 앓았다가 회복했고, 무엇보다 구조 조정이나 금리 폭등 같은 재난이 코앞에 다가와 있다는 건 전혀 모르고 있었거든. 물론 지독한 야근이나 체할 듯한 마감에 시달리고 있긴 했는데, 그래도 죽고 사는 문제에서 떠나서 퇴근 후 마트에서 먹고 싶은 음식을 고르고, 읽고 싶은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았던 거야. 별일 없는 하루하루가 주어질 때마다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던 거야. 있지, 그때 나는, 누구에게라도 외투를 벗어줄 수 있을 것 같았어. 나는 그 겨울 바람이, 내가 먹어본 어떤 크리스마스 초콜릿이나 코코아보다 달콤했어.


 오빠, 십이월인데 벚꽃이 피었대. 지난달에는 철쭉이 피었다고 그랬잖아. 그때 나는 계절을 착각한 꽃에게, 그게 마지막 순간일지도 모를 연약한 존재에게, 얼른 돌아가라고 말했었다? 여기가 아니라고. 지금은 안 된다고. 그런데 또 꽃이 피었다잖아…… …… 아무래도 그때 내가 잘못한 것 같아. 불쑥 찾아온 꽃도 꽃인데, 그 애들은 목숨을 걸고 온 건데, 나는 그더러 고작 '인간적인 실수'라고 치부해 버린 거야. 우리도 언젠가는 마지막으로 찾아오는 불쑥, 말고는 기다릴 수 있는 것도 없을 텐데. 나는 내가 한 말이 너무 후회돼서 눈물이 날 것 같았어.


 잘못 핀 꽃이라도 환영해 줘야겠다 싶었어.  대신 비가 내려도 기뻐해 줘야겠다 싶었어. 사랑해야지 사랑해야지. 어서 와, 얼마나 멀리서 온 거니. 기억할게, 내게 와 줘서 고마워…… 계절을 착각한 게 너희 뿐일라구. 자신이 꽃다운 존재라고 착각했던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구. 생에 단 한번 쏟아야 할 힘을 잘못 소진한 적이, 나도 있었다구…… 가로등 아래 부서지는 슬픔아, 나도 그렇게 부서졌었단다. 나도 그렇게 검은 바닥을 흘러 다녔단다. 나도 어느 경계를 서성이다…… 끝내 하얀 존재가 되지 못했단다.


 내게는 없는 존재, 언니, 오빠. 


 한 번쯤 불러보고 싶었어. 비가 와, 꽃이 펴, 하고 말을 걸어보고 싶었어. 언젠가 나 모르게 이 세상 살다 갔을라구. 어느 착각 속에 비나 꽃으로, 어쩌면 내 곁에 피붙이 같은 존재로 왔다 갔을라구. 닿지 못할 그곳에 내 유언을 전하고 싶어, 사랑해, 어느 계절에든. 계너머 어디든,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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