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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라 Dec 04. 2023

나를 읽지 말아 줘

#04

 12월의 첫 편지입니다. 조금 늦었습니다. 하마터면 당신에게 보낼 뻔했던 괴팍한 글을 다 지워야 했거든요. 이 겨울에, 나는 당신에게 착하고 다정한 사람이 되고만 싶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저 귀퉁이에서부터 다시, 살의가 들불처럼 번져오고 있었습니다. 못된 나, 다시, 당신을 죽이고 싶어졌습니다. 겨울에 느닷없이 열꽃을 피워낸 겁니다. 꽃이 또 계절을 착각한 겁니다.


 못된 내가 시키는 대로 글을 썼습니다. 나의 순수한 찬미를, 경애를, 추앙을, 환대를, 찬 거리에 세워두고 담배를 피우던 당신. 유독한 회색 연기 앞에서 언제나 쩔쩔매며, 벌 받듯 사랑했던 나. 그런 당신에게, 내가 왜 착해져야 하지? 나는 그때 의지가지 할 데 없었는데. 당신은 먼 나라의 불행한 소설가처럼 하얀 눈밭에서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밭은기침을 허덕이 죽어버릴 거라고, 그게 아니면 내가 당신을 죽여버릴 거라고, 나는 이보다 더한 저주도 끝없이, 끝도 없이 할 수 있다고!


 악마에 들린 거침없이 무서운 생각을 하 나 자신에게, 나는 한 번 살의를 느껴야 했습니다. 그건 착한 살의였을까요. 당신을 향해 필사적으로 외쳤습니다. 어서 나에게서 도망치라고. 어서 이 편지를 찢어버리라고. 나는 당신을 지켜줄 수가 없다고. 내가 당신을 곧 죽일 것 같다고.


 그 해괴하고 광포한 자아 분열의 순간에, 당신을 살린 건 무엇인지 압니까? 못된 나도 착한 나도 아닙니다. 차라리 그건, 외로운 나였습니다. 홀로 걸은 무수한 길이었습니다. 길가에 핀 작은 꽃이었습니다. 바람이었습니다. 계절이었습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차가운 이불속에서 벌레처럼 몸을 말고 울었습니다. 추저분한 용서를 했습니다.  명치를 조아렸습니다.  눈 아래 보이던 무릎도 잘라버렸습니다. 눈물이 바닥까지 완전히 떨어질 수 있도록.


 당신을 죽이려 했던 못된 나는 살인자. 못된 나를 죽이려 했던 착한 나도 살인자. 당신, 여전히 이 더러운 편지를 읽고 있나요? 이런 내 편지를 계속 읽을 건가요? 그런데 당신, 그때 나에게 답장을 써 줄 수는 없었나요? 단 한 번이어도 좋았는데.


 <당신을 살린 것>: 일월의 동백, 이월의 매화, 삼월의 산수유, 사월의 살구나무, 오월의 작약, 유월의 수레국화, 칠월의 도라지꽃, 팔월의 능소화, 구월의 코스모스, 시월의 석류, 십일월의 은행잎, 그리고 십이월의…


십이월의…


도망쳐.

.

.

.




*이 글에서의 '당신'은 특정한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노력과 순정, 실패와 절망 앞에서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무심유해한 담배만 피우던 세상의 모든 것, 어쩌면 그속에 나를 방치한 나 자신, 그리고 읽는 이가 순간적으로 떠올린 무엇이든, 이라고 해 두겠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특정한 한 사람은 아니고 특정한 몇 사람이긴 합니다.)(사람 이외의 것도 있습니다.)


*살의, 살인 등의 거친 표현들은 모두 문학적인 비유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불편하셨다면 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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