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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라 Feb 24. 2024

숲으로 가십시오. 그리하면 좋습니다.

#08

파편을 기웠습니다. 기워도 파편입니다. 끌리는 문단만 읽어도 됩니다. 순서를 섞어서 읽어도 됩니다. 새처럼 쉬었다 가셔도 좋습니다. 뒤로 가셔도, 앞으로 가셔도 됩니다. 마음 가는 대로 하십시오.




 뭐 하고 있었어요. 잘 지냈나요. 오랜만이에요. 이 말들이 귀하고 귀해질 때까지. 당신도 기다렸나요. 겨울이었습니다. 겨울이었으니까요. 편지를 쓰고 싶었는데요. 쓰지 못했습니다. 그러지 않기로 약속했으니. 네, 전해지지 못할 글 써서 뭐 합니까. 속만 아픈 술 마셔서 뭐 합니까. 당신이 없는데. 당신도 없는데. 당신은 죽지도 않고 내가 없는 모든 곳에 있는데.


 꿈속에서 만년필을 선물 받았습니다. 계속 쓰라 하네요. 만년 동안 쓰라 합니다. 만년은커녕 일 년도 간단치 않아얼른 펜을 들었습니다. 저 아직 여기에 있습니다. 달리 갈 데가 없기는 하지만요, 꼭 그래서만은 아닙니다. 모든 약속이 단지 사랑하는 동안만 유효한 것은 아니라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고, 내가 그것들 중의 하나라고. 조용한 날에 일기를 쓰고 싶어서입니다. 네,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쓰지 않기 위해서 쓰는 사람. 살아낸 시간을 꿈이라 믿는 사람. 취한 채 무효화된 세계를 지키는 사람.


 꿈속에서 우산을 잃어버렸습니다. 꿈속에서 내가 우산이었는데, 나는 하얀 눈밭에 누워있었는데, 참 좋은 느낌이었어요. 할 일을 다 끝냈고, 여행을 다 마쳤고, 나를 빌려갔던 모두에게 충분하게 우산이 되어주었고, 살이 헐거워졌고, 나무 손잡이가 결결이 찢어졌고, 그리하여 궂은 날들 주름주름 접어두니, 편안-하였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우산이었고요. 그로부터 더 이상 우산이 아니었습니다. 언젠가 펼치면. 새의 둥지가 될까요. 다시 접으면. 숲의 비밀이 될까요. 무엇이든 될 수 있습니다. 꿈속에서는 우산도 될 수 있습니다.


 어제는 숲 속에 있었습니다. 오늘은 숲 밖에 있었습니다. 저기에 내가 있고, 여기를 내가 봅니다. 이런 날도 있습니다. 숲 속과 숲 밖만이 모든 기준이 되는. 매일 조금 걷고, 조금 먹고, 조금 읽고, 조금 씁니다. 산아 산아 부르며 보채지 않습니다. 그토록 갈망했던 날들입니다. 네, 여기 천국입니다. 행복하냐구요. 행복합니다. 미쳤냐구요. 미치지 않고 어떻게 행복하겠습니까. 숲에 있으면 내가 얼마나 삶에게 고마워하고 있는지 알게 됩니다. 삶 또한 내게 화가 나지 않았다는 것을 쓸쓸하게 알게 되지요. 쓸쓸하지 않고 어떻게 행복하겠습니까. 당신도 그랬습니까. 외로웠습니까. 숲으로 가십시오. 그리하면 좋습니다.


 벌써 2월 말입니다. 여즉 녹지 않은 얼음도 있지만요, 저녁 6시가 넘어도 이제 괜찮습니다. 길을 잃더라도. 해가 지더라도. 신발이 젖더라도. 걷고 싶다면 걸으십시오. 시간이란 게 강물처럼 매양 흘러가는 게 아니더이다. 네, 그러하다면야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보아 하니 시간은 눈처럼 쌓여 있다가, 한동안 반짝이다가, 날빛이 들면 순식간에 녹아버리는 것이더이다. 더러는 속으로만 녹은 채 나뭇가지에 걸려 있다가, 사느랗게 반짝이다가, 끝까지 녹지 않고 행인들의 어깨 위로 도독도독 떨어지는 눈도 있더이다. 걸으십시오. 시간의 뭉치들을 맞으십시오.


 네,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내 편지를 읽었습니까. 다른 이들의 편지만 읽습니까. 마음 가는 대로 하십시오. 내 편지의 답장은 내가 하겠습니다. 당신은 쉬세요. 안하세요. 언제든. 어디서든. 보고 싶은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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