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깔이 고운데다
제법 잘생겨서
책상 앞 유리창 가에 놓았다.
풍란이 있던 자리
꽃 본 적 없지만
꽃을 떠올리며 보았다.
오렌지 한 개
새로 이사한 오피스텔
전원 스위치들이 손에 익을 때까지
오렌지가 보기 좋았다.
한 달쯤 지났을까
오렌지가 그대로였다.
색깔이며 모양까지 그대로였다.
오렌지가 썩지를 않는 것이었다.
늦가을이 왔다.
귤 한 봉지를 사왔다.
작고 못생긴 조생 귤
밤늦게 몇 개 까먹다가
풍란이 있던 자리
오렌지가 있던 자리가 커 보였다.
귤 한 개를 창가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나흘을 넘기지 못했다.
검은 반점이 조금씩 번지고 있었다.
안에서부터 썩는 것이었다.
썩는 것이 반가웠다.
썩어가는 것을 오래 두고 보았다.
무너지는 귤이 귤 꽃으로 보였다.
반가운 검은 꽃으로 보였다.
환한 검은 꽃으로 보였다.
나는 그래
오렌지 공포를 나의 입술을 움직이며 말하자면
트라우마.
어떤 기억은 고통의 무게나 부피와 상관없이 평생 잊을 수 없고.
사람들은 누구나 이름만 같고 형태는 다른 트라우마를 갖고 산다.
갖고
산다.
얼마나 행복한지를, 또 얼마나 불행한지를
매일, 매 순간 일일이 계산하는 사람은 없지만,
우린 이따금 아니 불시에, 자기도 모르게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오렌지를 발견한다.
정확하게 발견을 '하고야 마는' 것인데
낮과 밤을 따지지 않고 불쑥 발생하는 사건이라
신체적 고통을 느끼기도 전에
내 안에 썩어가는 무언가가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오렌지가 직접적으로 주는 고통의 근원을
세월의 흐름이라 여기게 되면
조금 나아지겠지, 싶겠지만 우리의 트라우마는 영원하다.
못 본 척을 해도 아주 잠깐일 뿐 결국 마주하게 된다.
하필 트라우마에 불멸이 깃든 것일까
썩어가는 것을 반갑게 맞이하게 되는 과정은 정말 오는 것일까.
오렌지를 오렌지로, 나쁜 기억을 나쁜 기억으로
그대로 발견하고 또 보고, 또 잊는 과정이 반복될수록
'검은 반점'이 마냥 검게만 보이지 않음을 알게 된다는데-
반갑지는 않아도 조금씩 안심이 되는 시간이라는데-
그렇게 계속 마주하다 보면
가끔은 썩기도 전에 손을 내밀 수도 있게 되고
발로 쳐낼 수 있게 되고, 온마음을 다해 품게 될 수도 있게 되는.
그렇게 검은 꽃을 환하게 느낄 수 있게 된다면
오렌지 공포에 흔들리더라도
'꽃을 떠올리며' 버텨낼 수 있으리라.
'오렌지 한 개'가 '썩지를 않는 것'에 벗어나
'작고 못생긴 조생 귤'이 '무너지는 귤이 귤꽃'으로,
'환한 검은 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