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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실밖 Apr 18. 2020

주말 아침, 틈새 자유

스테들러 연필, 파버카스텔 연필깎이 

꼭 읽고 싶지만 주중에 집중하기 힘든 책은 주말 아침에 읽는다. 조금 일찍 일어나 세수를 하고 책상에 앉으면 이때부턴 온전히 나의 시간이다. 마감이 닥친 글이든, 써야 할 글이든 잠시 잊고 텍스트에 몰입할 수 있으니 좋다. 그렇다고 대단한 인식욕으로 무장하는 시간도 아니다. 지적 욕구가 충만하여 이때 읽는 글이 머릿속에 질서 있게 정돈되는 것도 아니다. 

이 행위는 그저 '의식'같은 것이다. 내 또래의 인간들이 이런저런 취미를 벗 삼아 시공간을 향유하듯, 나 또한 주말 아침 두어 시간 나만을 위한 시간을 예비해두고, 귀한 것이라도 저축을 해 놓은 양 그저 만족해하는 소시민적 자유 같은 것이다. 


파버카스텔 연필깎이, 스테들러 연필


오늘은 책을 펼친 다음 주변에 보이는 연필을 다 깎아 보았다. 사진 속 스테들러 연필이 보인다. 스테들러 연필은 1662년 독일 사람 프리드리히 스테들러(Friedrich Staedtler)가 자신의 집 안에서 연필을 만든 이후 1835년에 제바스티안 스테들러(Johann Sebastian Staedtler)가 연필공장을 만들어 본격 생산했다고 알려져 있다. 지금 이 회사는 독일의 대표적 문구류 생산회사가 됐다.  


연필깎이로는 파버카스텔을 쓰는데 역시 독일 사람 카스타르 파버가 연필을 만든 것이 이 문구류의 처음으로 알려져 있다. 이 연필깎이는 특히 녹색과 노랑을 주조로 하고 빨강과 파랑을  섞은 컬러로 유명하다. 보색 대비의 색을 단순하고 강렬하게 배치하여 딱 고유의 기능에 충실하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연필을 깎는 행위는 그 자체로는 최종 목적이 아니고 무엇인가를 준비하는 과정이다. 커터 칼로 연필을 깎는다면 손과 눈, 그리고 적당한 근력의 조절이 필요하다. 자칫 칼을 잘못 놀려 손을 베면 안 되기도 하고, 연필을  단정하게 깎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집중을 요구한다. 연필을 깎는 것은 무엇인가 '좋은 일'을 위한 엄숙한 과정이다.


파버카스텔 연필깎이로 연필을 깎을 때도 사람마다 핸들을 돌리는 힘이 다르고, 연필심의 예리함이 다르다. 기계로 깎은 것이니 다 같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쓰는 사람의 취향을 반영한다. 처음에 연필을 입구에 물리고 핸들을 돌려 연필을 깎기 시작하면 그때부턴 이 놈이 연필을 잡아당긴다. 물고 들어간다는 말이 더 적절하겠다. 끝내 쓸 수 있는 모양으로 어엿하게 깎아 놓고 이내 연필을 놓아준다. '넌 쓸 준비가 됐어. 나가도 돼' 하는 말을 하는 듯하다. 그전까지는 고집스레 '아니, 아직 아니야'라고 하면서 놓아주지 않는다. 사소한 물건들도 모두 제 목표와 그것을 이루기 위한 고집이 있다. 


연필을 가볍게 쥐고 종이 위에 글을 쓰면 특유의 필기감과 소리가 있다. 연필심은 종이 위에서 자유롭게 유영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 글쓰기와 속도에 있어 절제를 요구한다. 소리는 어떠한가. 보통 우리가 필기용으로 많이 쓰는 HB 연필을 쓸 땐 볼펜 등에서는 듣기 힘든 '좋은' 소리가 난다. 그 소리는 마치 '글쓰기를 서둘지 말라'는 것으로 들린다. 소리가 속도를 제어하는 느낌이다. 


연필은 공부하는 사람, 일기를 쓰는 사람, 스케치를 하는 사람에게 두루 쓰인다. 새 것으로 시작하여 더는 쓰기 힘든 몽당연필이 되기까지 제 소임을 진중하게 이행한다. 연필을 쓰는 사람은 그래서 뭔가 제 삶에 충실할 것 같은 느낌이 있다. 


오늘 꺼내 든 책은 우치다 타츠루의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이란 책인데, 우치다의 글에는 특유의 '문체'가 있다. 타자에 대한 깊은 시선 속에 저자와 독자 사이에 놓이는 '모호함'을 진정 즐길 줄 아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때로 '사는 게 뭐 이래?'라고 투정을 하다가도 이 분의 책을 잡으면 내게는 삶을 가벼이 여길 아무런 권리도 없음을 자각한다. 이제 책을 읽을 시간이다. 따뜻한 밀크티를 한 모금 넘긴 후에 책의 첫장을 펼치는 이 기분은 매일 맛보는 흔한 느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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