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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실밖 Oct 25. 2024

소라의 겨울(3)

먹을 수 있을 때 먹어 두지 않으면 후회한다

  - 외삼촌이 소파에 누운 채로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어. "엄마, 지금 어디예요?... 언제 들어와요?... 두 시간 후요? 알았어요."라고 하더니 전화를 끊었어. 외삼촌은 소파에서 일어나 내가 있는 방으로 왔어. "소라야, 삼촌하고 얘기 좀 할래?" 외삼촌이 방으로 성큼 들어오면서 쉰 목소리를 냈어. "무슨 얘기를..."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외삼촌은 나를 침대 위에 넘어 뜨렸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야. 그리고 지옥 같은 시간이 흘렀어.


  외삼촌은 밖으로 나갔어. 나는 욕실에 들어가서 미친 듯이 몸을 닦았어. 방으로 돌아와서 침대 시트를 걷어 속옷과 함께 욕조에 넣고 물을 받은 다음 가루비누를 한 움큼 넣고 막 밟았어. 온몸이 아팠고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았어. 외삼촌이 다시 들어올까 봐 너무 무서웠어. 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안방으로 가서 할머니가 쓰는 화장대의 서랍을 열었어. 오만 원짜리 한 장과 만원 짜리 몇 개를 집어든 다음 가방을 메고 밖으로 나왔어.


  몸이 아프고 쓰려서 걷기가 힘들었어.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은 너에게 전화를 거는 거였어. 그러나 걸지 못했어. 나는 거리를 걷다가 아무 버스나 탔어. 많은 사람들이 버스를 타고, 또 내렸어. 나는 어디에 내릴지 생각도 하지 못했어. 종점에 도착하여 버스에서 내렸을 때 이미 밖은 어두웠어. 할머니에게서 전화가 왔어. 난 받을 수가 없었어. 근처에 찜질방이 보였어. 난 그곳으로 들어갔어.


  온몸의 기운이 다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어. 나는 찜질복으로 갈아입고 수면방으로 들어가 누웠어. 그리곤 잠이 들었어. 다시 깨어났을 땐 새벽 두 시쯤이었어. 수면방 안은 조용했어. 한쪽에서 코 고는 소리가 들렸어. 나는 아침까지 꼬박 뜬 눈으로 누워있었어. 너무 외롭고 슬펐어. 몇 번이나 너에게 전화를 하려고 폰을 들었지만 결국 전화하지 못했어. 그 사이에 할머니는 여러 번 전화와 문자를 보내왔어. 한 번도 응답하지 않았어.

  이튿날 나는 학교에 가지 않았어. 아침에 담임에게서 전화가 왔어. 받을 수 없었지. 나는 문자로 '선생님, 오늘 몸이 아파서요. 하루 결석할게요.'라고 썼어. '몸조리 잘하고 내일 학교 올 때 약봉지 챙겨 와라.'라고 담임이 답신 문자를 보내왔어. 배가 고팠지만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어. 난 탕에 들어가 몸을 씻었어. 몇 번이나 비누칠을 하고 씻고 또 씻었어. 샤워를 하면서 울었어. 탕 안에 있던 사람들이 흘깃 쳐다보았지만 이내 자기들 몸 씻기에 바빴어. 탕에서 나와 옷을 입는데 머릿속이 하얘져서 무슨 생각도 나지 않았어. 탈의실에서도 한참을 멍하니 있었어. 밖으로 나가기가 두려웠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어. 




  여기까지 쓰고 나니 어깨와 팔이 저려왔다. 저녁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침, 점심까지 거르고 보니 배도 고팠다. 침대에서 내려와 문 밖으로 나갔다. 식당 쪽에서 음식 냄새가 났다. 센터장이 소라를 발견하고 "일어났구나. 저녁 먹을 준비해라. 종일 굶어서 배고프겠다."라고 말했다. 같은 방의 아이들도 외출에서 들어왔다. 갑자기 쉼터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그중 한 아이가 "뭐 맛있는 거 해요?" 하면서 주방 쪽을 기웃거렸다. 쉼터에는 소라가 있는 방의 세 명 외에도 다른 방에 있는 여자 아이들이 있었다. 모두 여덟 명쯤이었다. 그들은 한 테이블에 네 명씩 두 테이블에 앉았다. 센터장과 쉼터의 직원 세 명도 다른 테이블에 앉았다.

  센터장은 오랜만에 식당이 북적거린다면서 흡족해했다. 센터장은 "자, 맛있게 먹자. 자기 앞에 놓인 것은 다 먹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모두 수저를 들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소라는 센터장의 말을 듣고 지영이를 떠올렸다. 지영이도 음식 남기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했었다. 쉼터의 식사는 학교 급식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밥과 국이 있고 서너 가지의 반찬이 있는 단출한 식사였다. 아이들은 대화를 나누며 소란스럽게 밥을 먹었다. 음식 냄새가 나자 소라의 뱃속이 요동쳤다. 밥 한 숟가락을 떠서 입에 넣었다. 국도 한 숟갈, 그리고 김치와 두부 부침도 먹었다.


  몇 숟가락의 밥을 뜨며 소라는 밥은 절대 남기지 말라는 지영이의 당부를 떠올렸다. 지영이와 함께 있다면 내가 밥을 남겨도 다 해결해 줄 텐데. 오늘따라 유난히 소라는 지영이의 밥 먹는 모습이 그리웠다. "먹어야 해, 먹을 있을 먹어 두지 않으면 후회하는 우리 생활이야." 작년에 가출팸에서 만난 언니는 그렇게 말했다. 세상에 가장 미련한 사람이 먹을 기회가 생겼는데도 챙겨 먹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소라는 오랜만에 밥을 반 공기나 비웠다.


  이곳에 오고 나서 처음으로 소라의 방에서 세 명의 여자 아이들이 마주 보고 바닥에 앉았다. 며칠 동안 말없이 조용하게 지내던 소라가 밥도 먹고 정신이 들어 보였는지, 두 사람 중 소라 또래로 보이는 아이가 질문을 퍼부었다. "여기 오기 전에 어디 있었니?", "학교는?", "엄마 아빠랑 연락하니?", "친구는 있니? 남자 친구는?" 아이는 속사포처럼 질문을  쏟아냈다. "여기 오기 전에는 친한 언니들이랑 어울렸고, 학교는 안 다니는데, 계속 다녔으면 고1이고.. 아빠는 작년에 돌아가셨고, 엄마는 아픈데.." 둘 중 한 명은 소라보다 한두 살 많아 보였으므로 소라는 존댓말도 아니고 반말도 아닌 어색한 답변을 했다. 둘은 귀를 세우고 소라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그 이상 소라가 해줄 말은 없었다.

  둘 중 한 아이는 소라와 동갑이었다. 그리고 한두 살 많아 보였던 아이는 고1 때 자퇴를 했는데 계속 학교에 다녔으면 고3이라 했다. "네 이름이 소라인 것은 들어서 알고, 난 영주야. 그냥 언니라고 불러."라고 말했다. "난 세미야. 여기 있는 동안 친하게 지내자." 동갑인 아이는 새 친구를 만났다는 것에 들떠 있었다. 쉼터의 각 방에는 이층 침대 두 개와 책상이 두 개 있었다. 공부도 하라는 뜻으로 한 방에 두 개씩 넣어 둔 것 같았지만 아이들은 그 위에 잡동사니 물건을 얹어 놓거나, 옷을 벗어 걸쳐 놓는 용도로 사용했다. 아이들이 벗어 놓은 옷으로 책상 위는 수북했다.



- 찜질방에서 이틀을 보낸 나는 용기를 내서 경찰 지구대에 찾아갔어. 외삼촌이 벌을 받아야 할 것 같았거든. 그렇지 않으면 내가 제대로 살 수가 없을 것 같았어. 지구대 주변을 서성이다 안을 들여다보았어. 지구대엔 아무도 없었고, 출입문은 잠겨 있었어. 출입문에 '급한 용무가 있는 분은 여기로 전화하세요'라는 글귀와 전화번호 하나가 적혀 있었어. 그냥 가버릴까 생각하다가 조금 더 기다리자 하고 서성이고 있는데, 순찰차가 한 대 오더니 두 명의 경찰이 내려서 지구대 안으로 들어갔어.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경찰을 따라 들어갔어. "뭔가요? 무슨 일 있어요?"라고 경찰 중 한 명이 물었어. 내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어. "신고하고 싶어요..."

  경찰은 놀라서 "무슨 신고요? 도난당했어요? 아니면 물건을 뺏겼어요?" 이렇게 재차 물었어. 내가 말했어. "아니 그게 아니구요. 혹시 여기 여자 경찰분은 안 계신가요?"라는 말에 두 명의 경찰은 서로를 쳐다보았어. "아, 잠시만요... 전화 좀 할게요." 경찰은 어디론가 전화했어. "여기 여학생 한 분이 신고를 하러 왔는데 여자 경찰관을 찾습니다. 누가 한 번 오셔야 할 것 같은데요."라고 말하곤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저 쪽 의자에 좀 앉을래요? 조금 기다리면 누가 올 겁니다."

  잠시 기다리자 순찰자 한 대가 오더니 젊은 여자 경찰관이 내렸어. "아, 이분이세요? 무슨 일이죠?" 앳돼 보이는 여자 경찰은 나에게 물었어. 난 작게 말했어. "신고를 하고 싶어요..." 여자 경찰은 나를 쳐다보며 말했어. "그러니까 무슨 신고요?"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어. "여기서는 좀..." 내가 망설이자 여자 경찰은 "그러면 서로 갑시다."라고 하면서 밖으로 나가자는 손짓을 했어. 그래서 나는 여자 경찰을 따라 구청 옆에 있는 경찰서 소년과로 갔어.

  엘리베이터에 탔을 때, 복도를 걸을 때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나만 쳐다보는 것 같았어. 난 무섭고 떨렸어. '내가 말은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무엇부터 말해야 하지?' 내 머릿속은 다시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여자 경찰은 상관인 듯한 사람에게 뭐라고 말을 했어. 잠시 후에 경력이 있어 보이는 여자 경찰이 나에게로 왔어. "신고할 것이 있다고 했죠? 이쪽으로 올래요?" 내가 따라간 곳은 아주 조그만 방이었어. 탁자와 의자가 두 개 있고, 밖이 보이지 않는 창이 있었어.

  "자, 어디 이야기를 좀 들어봅시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제가 성폭행을 당한 것 같아요."
  "이런... 누가 언제 그랬나요?"
  

  조사하는 경찰이 의자를 바짝 당겨 앉았어.

  "내가 한 가지씩 물어볼게요. 차분하게 이야기해 줘요. 그 일이 언제 발생했나요?"
  "삼일쯤 된 것 같아요."
  "장소는요?"
  "... 그냥... 집이요."
  "아, 집... 그런데 벌써 며칠이 지났네요. 누군지 얘기해 줄 수 있어요?"

  난 차마 외삼촌이 그랬다고 말할 수가 없었어.

  "그냥 아는 사람... 어른이었요."
  "혹시 이름을 알아요?"
  "이름은 정확하게 모르는데요..."
  "병원에 갔었나요?"
  "아니요. 그날은 많이 아팠는데 다음날부턴 참을만해서 안 갔어요."
  "아... 혹시 몸을 씻었어요?"
  "예, 깨끗이 씻었어요."
  "몇 번이나요?"
  "아주 여러 번..."

  "아..."

  경찰은 짧게 탄식했어. 그리고는 점점 더 구체적으로 물어보았어. 그때 입었던 속옷을 가지고 있냐, 장소가 어디냐, 이불이나 침대 시트가 있느냐, 그 일이 있고 나서 어떻게 했느냐와 같은 내용을 쉴 새 없이 물어보면서 내가 말을 할 때마다 노트북의 자판을 두드렸어. 난 수치심을 느꼈지만 외삼촌이라는 것만 빼고 나머지는 기억이 나는 대로 다 말했어. 나는 그때 토할 것 같았고, 더러운 것이 내 몸에 묻은 것 같아서 깨끗하게 여러 번 씻었고, 그날 밤에 찜질방에 가서 또 씻었다고 했어. 속옷과 침대 시트는 비누를 풀어서 빨았다고 했어.

  경찰은 점점 실망하는 눈빛이었어. 그러면서 저항했느냐, 격렬하게 저항했느냐, 저항하다가 몸에 상처가 났느냐, 보여줄 수 있느냐고 물었어. 난 그때 거의 기절한 상태였거든. 처음엔 저항했지만 온몸에 힘이 빠져서 저항할 수 없었다고 했어. "좀, 볼게요." 하면서 경찰은 내 손목을 잡더니 옷소매를 올리고 상처 난 곳이 있는지 살폈어. 목 주변과 뺨도 자세히 살펴보았어.  

  "쉽지 않겠는데요."
  "예?"
  "범죄를 입증할만한 증거를 모으기가 힘드네요. 그래도 한 번 해 봅시다. 그 사람에 대해서 아는 것을 다 말해봐요. 관계, 연락처... 뭐라도 좋아요. 병원 진찰도 받아 보아야 하는데 며칠이 지나서 특별한 내용이 나올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병원에 다녀오세요. 밖으로 나가면 안내해 줄 겁니다."

  나는 젊은 여자 경찰의 안내를 받아 그 근처의 산부인과로 갔어. 의사는 이것저것 물어보고 진찰대에 누우라고 했어. 난 부끄러웠어. 나중엔 거의 자포자기 상태에서 의사가 하라는 대로 했어. 의사는 자꾸 힘을 빼라고 했어. 내 몸속으로 기구가 들어왔어. 너무 아팠어. 의사가 몇 가지를 더 물어보았어. 난 여기서 빨리 나가고 싶어서 생각나는 대로 답했어. 진찰을 끝내고 의사는 컴퓨터에 뭐라고 입력을 하더니 종이 한 장을 출력해서 젊은 여자 경찰에게 넘겼어. 난 다시 경찰서로 갔어. 작은 방으로 들어가자 아까 조사했던 경력 있어 보이는 여자 경찰이 서류를 들고 들어와 앉았어.

   "부모님에게는 말씀드렸어요?"

   "아빠는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고, 엄마는 아프세요." 

   "엄마가... 어디가 아프신가요?"

   "그냥... 아빠 돌아가시고 나서 병원에 입원하셨어요."

   "그렇군요... 엄마, 아빠가 다 그러셔서... 힘들었겠네요. 어디서 살았어요?"
   "외할머니댁에서 살았어요. 거기서 학교 다녔어요."
   "외할머니 말고 다른 식구도 같이 살았나요?"
   "외삼촌이요."
   "혹시... 외삼촌이 그랬나요?"
  
  경력 있어 보이는 여자 경찰은 이 질문을 하면서 내 눈을 똑바로 보았어.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 병원에서 가져온 서류를 읽어본 경찰은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아... 이거 쉽지 않겠는데?"라고 말했어. "일단 돌아가서 좀 쉬고, 또 부르면 그때 다시 와요. 아마 상담 선생님이 연락을 할 겁니다. 다 그렇게 하는 거니까 상담을 잘 받아봐요."라고 말했어. 난 고개를 끄덕였어. 그리고는 젊은 여자 경찰을 불러 "데려다줘요."라고 말했어. 아까 나를 경찰서로 데리고 왔던 젊은 여자 경찰을 따라 나와 경찰차를 탔어. 경찰은 운전을 하면서 백미러를 쳐다보며 어디에 내려줄지를 물었어. 어디로 갈 건지, 머물 곳이 있는지는 묻지 않았어. 머물렀던 찜질방 근처에 다다르자 내려달라고 했어. 경찰차에서 내린 나는 찜질방으로 다시 갔어. 다리가 후들거렸어.


  찜질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찜질복으로 갈아입고 곧바로 수면방으로 향했어. 맨 구석 자리로 가서 누웠어. 하염없이 눈물이 나왔어. 진동이 울려 휴대폰을 보니 번호로 문자가 왔어. '여기 경찰서 앞 사거리에 있는 마음건강 상담실인데요. 많이 힘들었죠? 시간 될 때 한 번 방문해 줄래요? 오기 전에 전화 주세요. - 이유진 원장' 문자가 흩어져 화면에서 제각각 움직이는 것 같았어. 내가 그곳에 가면 또 처음부터 물어보겠지?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은 싫었어. 문자에 답신을 보내지 않고 휴대폰을 껐어. 모든 게 귀찮았어. 너도 알잖아. 내가 원하지 않을 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 난 수면방에서 잠이 들었어.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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