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겨울이 돌아왔어. 봄이 되면 나도 알바를 할 수 있다고 아이들이 말했어. 나는 되도록 빨리 알바를 하고 싶었어. 여기 생활비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었으면 했거든. 내가 시간이 가장 많이 남으니까 당번이 아닐 때도 집안 청소와 세탁을 하곤 했어. 아이들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지만 나만 공짜밥을 먹는 것 같아 모두에게 미안했거든. 하도 청소를 자주 해서 집안이 반들반들 윤이 났어. 여기 식구들도 모두 나를 좋아했어. 저녁에 들어올 때는 소라 먹이려고 가져왔다면서 치킨과 피자를 내놓곤 했어. 간식을 배부르게 먹고, 콜라까지 들이킨 명수는 "끄억!"라고 트림을 했어. 그 표정이 얼마나 만족스러워 보였는지 몰라.
지영아. 난 태어나서 가장 긴 글을 쓰고 있어. 그것을 받을 사람이 너라서 안심이야. 만약 '정미 언니가 없다면'이라고 상상하면 눈앞이 아득해졌어. 요샌 꿈도 꾸지 않아. 어쩌다 꿈을 꾸어도 어른들은 나타나지 않아. 내가 아이들만 나오는 꿈을 꾸겠다고 다짐했거든. 어느 날 초인종이 울렸어. 어떤 아줌마였어. "소독이요." 하더니 들어와서는 주방과 화장실에 소독약을 칙칙 뿌리고 나갔어. 나가면서 "지금 학교 갈 시간 아닌가? 어디가 아파서 집에 있는겨?"라고 말했어. 나는 속으로 웃었어. 어떤 어른이든 관심사는 딱 한 가지, 아이들은 학교에 가야 한다는 것이었어.
쉼터에서의 생활은 단조로웠다. 계속 새로운 아이들이 들어오고 며칠 머무르다 어디론가 나갔다. 이제 이곳에서는 소라가 가장 오래 있는 셈이었다. 센터장은 가끔 어디서 전화 온데 없느냐고 물었다. 복지사는 이제 일주일에 한 번씩 전화를 했다. 무슨 일이 있는지, 가족이나 친척에게서 연락이 왔는지 물었다. 누구도 이곳에 오래 있다고 해서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 무료한 날이 지나갔다. 정미 언니와 분위기가 비슷했던 그 언니도 어디론가 사라졌다.
상담사는 한 달에 한 번 왔다. 올 때마다 똑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기분이 어떤지, 학교에는 가고 싶지 않은지, 어떤 생각을 가장 많이 하는지, 특별히 하고 싶은 것이 있는지."를 물었다. 소라의 대답도 한결같았다. "나도 모르겠어요. 아무 생각도 안 해요. 왜 그런지 나도 몰라요."라고 성의 없이 답변을 해도 상담사는 짜증 내지 않았다. 상담이 끝나면 메모하던 수첩을 가방에 넣고는 "행복했던 생각을 자주 하세요." 하면서 돌아갔다. 문밖을 나서는 상담사의 뒷모습이 '오늘 일은 끝났다'라는 듯 가벼웠다.
이곳 생활에 익숙해지니 소라는 주방에 가서 설거지도 하고, 세탁하는 일도 도왔다. 이곳에 오는 아이들의 패턴은 비슷했다. 처음 며칠 동안 혼란스러운지 밥도 제대로 안 먹고, 대화도 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배가 고프면 밥을 먹기 시작했고, 밥을 먹고 난 다음부턴 말을 했다. 그러다가 부모가 나타나서 데려가기도 하고 다른 기관으로 옮기기도 했다. 가끔 경찰이 와서 아이들에게 이것저것 묻다가 돌아갔다. 나쁜 일을 하다가 걸려서 소년원으로 가는 아이들도 있었다. 소라는 하루 중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지영이에게 편지를 썼다. 처음에는 보내지 않을 편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 편지가 끝날 때쯤이면 지영이를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지난 일을 떠올리면 여전히 두통이 찾아왔지만 최근에는 많이 좋아졌다. '나쁜 생각만 하고 어떻게 살아...'라고 혼자 되뇌곤 했다.
센터장은 아무에게서도 소라에게 연락이 없는 것을 의아해하면서도 소라가 이곳 생활에 적응하여 잘 지내는 것에 만족한 듯했다. 게다가 눈치도 있고, 청소와 설거지도 함께 해주니 일손도 덜 수 있었다. 말썽만 생기지 않는다면 여기서 일을 도우면서 계속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소라와 짧은 대화를 나눌 때도 은연중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면'이라는 단서를 달았다. 다른 아이들은 가족이 있는 집에서 나와 쉼터까지 오지만, 소라는 돌아갈 집이 없다는 것을 센터장도 알았다. 시설로 가면 그곳에서 학교를 다닐 수 있다고 말했다. 시설에는 18세까지 있을 수 있다고 하였다. 가출팸을 전전하던 아이들은 규칙이 있는 쉼터에 들어오지 않으려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쉼터까지 오는 아이들이 훨씬 어려운 처지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다. 소라는 복잡하게 생각하기 싫었다. 어디로 가든 어른들이 없는 곳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지영아. 너에게 편지를 쓰면서 지난 시간을 정리할 수 있었어. 지금도 너는 나를 찾고 있겠지. 쉼터에서 학교로 연락을 했다면 아마 작년에 다니던 중학교로 했을 거야. 중3 때 담임에게 연락을 했다면, '아 그 질병 결석 자주 하던 애?' 정도로 나를 기억하고 있을 거야. 아니면 벌써 잊었을 수도 있고. 졸업식에는 가지 않았고, 고등학교에는 들어가지 않았어. 가끔 나를 아는 모든 사람에게서 잊히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 물론 지영이 너는 예외지만. 이제는 경찰도, 상담사도 연락이 없어. 복지사만 가끔 찾아왔는데 올 때마다 다른 곳으로 옮기고 싶냐고 물었어. 난 환경이 바뀌는 것이 싫어서 그냥 여기 있겠다고 했어. 복지사는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하라 했어. '뭐 딱히 없는데요.'라고 말하니 일지에다가 '딱히 없음'이라고 적었어.
지영아. 내가 정미 언니와 함께 가출팸에 있었다고 했잖아.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곳에서 생활은 좋았어. 계속 거기 있었다면 나는 너를 일찍 만날 수 있었을지 몰라. 무엇보다 정미 언니와 함께 있으면 너무 마음이 편안했어. 가끔 손을 잡아주면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따뜻함이 있었어. 내가 그 손을 놓지 않으면 언니도 오래 잡고 있었어.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친구들 모두 그곳에 오래 있고 싶어 했어. 가끔 치킨과 맥주를 먹을 때도 있었어. 아이들은 맛있게 먹고 마셨어. 그리고는 뒤처리를 말끔하게 했어. 정미 언니가 심심할 땐 책을 읽으라고 하면서 자기 방에 있는 책들을 소개해 주기도 했어. 어떤 책도 눈에 들어오진 않았지만 책에 대해 이야기해 주는 정미 언니의 음성이 좋아서 난 자주 물어보곤 했어. 정미 언니도 이곳 생활이 편안한 것 같았어. 아이들을 위해서 희생하는 데 정미 언니가 불편하면 나도 불편할 것 같았어.
초겨울의 어느 날이었어. 저녁을 먹고 거실에서 티브이를 보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어. 명수가 문을 열자 건장한 남자 어른들이 신을 벗지 않고 거실에 들어왔어. 그들은 우악스러운 목소리로 "야, 정민아. 얼굴 좀 보자!"라고 말했어. 이곳에 정민이란 이름은 없었거든. 정미 언니가 나섰어. "나가서 얘기해요. 아이들이 있으니까..." 정미 언니의 본명이 정민이었나 봐. 난 혼란스러웠어. "이년아. 나가긴 어딜 나가. 아주 그냥 여기서 소꿉장난 하고 있었네? 오빠들이 도와줬으면 너도 할 도리를 해야지.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니?" 남자 어른들은 금방이라도 정미 언니를 때릴 기세였어.
"야, 됐고. 돈은 마련됐어? 그거 받고 갈라니까. 좀 가져와 봐라. 계좌이체도 가능해." "지금 마련하고 있으니까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 "아니 시간을 몇 번을 더 줘... 얘가 아주 간이 부었구나. 여기서 자선사업하셨나? 잔말 말고 따라와" "옷 좀 갈아입구요." "야 이 미친년이 이 와중에 품위유지 하시려고? 그냥 따라 나와. 밖에 용호 형님한테 얘기해."
정미 언니는 남자들을 따라 나갔어. 잠시 후 '용호 형님'이란 사람을 만나고 들어온 정미 언니는 "너희들 놀랐지? 내가 좀 가볼 곳이 있거든. 아마 이 집은 비워주어야 할지도 몰라. 미안하다..."라고 빠르게 말했어. 그리고는 옷가지를 챙겨 나갔어. 밖에서 남자들이 외쳤어. "야, 미친년아 빨리 안 나와?" 정미 언니는 표정이 어두웠어. 나를 걱정스레 바라보았어. 나는 달려가서 정미 언니 품에 안겼어. "언니, 난 언니가 없으면 안 되는데... 안 가면 안 돼요?" 정미 언니 품은 언제나처럼 따뜻했어. 언니는 가볍게 나를 밀어냈어. 밀어내는 손길이 얼마나 원망스러웠는지 몰라. "잘들 살아라. 아마 앞으로 연락도 안 되지 싶다." 명수가 나섰어. "아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연락도 안 돼요?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지?" 아이들 모두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어. 그렇게 정미 언니는 남자들을 따라갔어.
우린 모두 뜬 눈으로 밤을 새웠어. 다음 날 아침에 부동산에서 아저씨가 왔어. 어제 그 남자들이 이 집의 전세금을 모두 찾아갔다는 거야. 우리가 3억을 부담할 수 있으면 계속 살고, 아니면 일주일 내로 집을 비워달라고 했어. 주인이 월세는 싫다고 전세만 놓겠다고 했대. 티브이, 냉장고, 세탁기와 침대 같은 가구는 오후에 차가 와서 다 실어간다고 했으니 정리해 놓으라고 했어.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어. 정미 언니와 헤어진 것도 기가 막힌데 이제 갈 곳도 없게 생겼지 뭐야. 아이들이 거실에 모였어. 명수가 물어봤어. "다들 어떻게 할 거니?" 남자아이들 중 한 명은 그냥 집으로 들어가겠다고 했어. 명수는 집으론 도저히 갈 수 없다고 월세방이라도 얻어 나가겠다고 했어. 나머지 한 명은 "따라가면 안 될까?"라고 말했어. 여자아이들 중 한 명은 집으로 들어가겠다고 했고 한 명은 이모댁으로, 나머지 한 명은 명수를 따라가고 싶다고 했어.
이제 나만 남은 셈이야. "소라는 어떻게 할 건데?" 명수가 물어왔어. "난, 글쎄... 딱히 갈 곳은 없는데..."라고 말하자, 원한다면 같이 가자고 했어. "생각 좀 해볼게." 난 지낼 곳이 없어진 것에 대한 불안감보다 정미 언니와 떨어져 있다는 것이 너무 슬프고 믿기지 않았어. 명수를 따라간다고 해도 정미 언니가 없는 곳에서 혼숙을 하고 싶지는 않았어. 나쁜 부모가 있어도 집이 있는 아이들이 있고, 그렇지 않으면 월세라도 얻어 독립하겠다는 아이들은 이 상황을 담담하게 받아들였어.다음 날 우린 옷가지를 챙겨 캐리어에, 배낭에 쑤셔 넣고는 나중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어. 난 배낭을 메고, 캐리어를 끌면서 무작정 걷기 시작했어. 정미 언니라면 어떻게 하라고 했을까. 혹시 몰라서 정미 언니에게 전화를 했더니 '없는 번호'라고 나왔어. 난 다시 절망했어. 아무 생각 없이 발이 아플 때까지 걸었어.
소라는 여기까지 쓰고, 어깨를 두드리며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는 정처 없이 걷던 그날을 떠올렸다. 겨울 동안 이곳저곳 가출팸과 찜질방을 전전했다. 소라의 얼굴을 유심히 관찰하던 어떤 남자 어른은 자기가 기획사의 피디라고 하면서 카메라 테스트를 하자고 하였다. 당장 한 끼 먹을 돈조차 없던 소라는 아저씨를 따라갔다. 그곳은 기획사가 아니라 연기 학원이었다. 원장이라는 사람이 물었다. 연예인 하기에 좋은 얼굴과 몸을 가졌다고 하면서 여기서 조금 수련을 쌓으면 기획사 연습생으로 들어갈 수도 있고, 잘만하면 드라마에도 출연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수강료에다 초기 의상비, 화장품비, 숙소비로 천만 원 정도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번주까지 마련해 올 수 있냐고 하면서 소라의 표정을 살폈다. "손댈 곳도 없어. 아주 좋아. 오랜만에 만나보는 자연미인이네..." 하면서 음흉하게 웃었다. 그러면서 갈곳이 없으면 학원에 방이 있으니 지내라고 했다. 소라는 겁이 났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뻔했다. 소라는 학원을 나왔다.
오늘도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아 배가 고팠다. 편의점에 가서 컵라면을 사서 뜨거운 물을 붓고 기다렸다. 라면에 젓가락을 넣어 휘저으니 뜨거운 김이 훅 하고 올라왔다. 소라는 다시 슬퍼졌다. 이제 소라 또래의 아이들은 얼굴만 보아도 가출한 애인지 아닌지 구분이 갔다. 자포자기 심정으로 가출한 아이를 무작정 따라간 적도 있었다. 대부분 좁아터진 방 하나에 남녀 아이들이 엉켜서 대여섯 명이 생활하곤 했다. 십대 아이들이 어른 남자와 함께 지내는 곳도 있었다. 그 경우엔 거의 어른 남자가 십대 아이들을 시켜 못된 짓을 하곤 했다. '갈곳 없는 분 재워줌. 10대 환영'이라고 SNS에 올리는 어른들도 있었다.
변두리 가출팸에서 만난 준호가 자기와 동업을 하자고 했다. "소라 넌 이쁘니까 잘하면 돈을 벌 수 있어. 나하고 여기 영식이하고 앱에서 아저씨를 꼬실 거야. 물론 네 사진으로. 그러면 액수를 정하고 모텔로 가거든. 오해하지 마. 그 남자하고 잠을 자라는 것이 아니야. 방 호수만 문자로 보내줘. 정확히 5분 후에 나랑 영식이하고 들이닥쳐서 사진을 찍을 거야. 그리고 그 남자 집에 알리겠다고 협박을 하는 거지. 유부남이고 아이들이 있으면 더 좋아. 전에도 아는 형하고 해보니까 제발 집에만 알리지 말라고 하면서 그 자리에서 오백만 원을 우리에게 계좌이체 해줬다니까? 어때 한 번 해보지 않을래?"라고 진지하게 물었다.
처음에는 말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론 솔깃했다. 한 번에 그 정도 돈을 벌 수 있다면 더는 배가 고프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소라가 처음 남자아이들과 '동업'을 할 땐 정말 떨렸다. 모텔방에 들어가 침대를 보자 외삼촌 생각이 났다. 그러나 5분만 참자 하고 가만히 있으면 준호와 영식이 들이닥쳐 "아니, 소라야. 네가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오빠가 찾았잖아. 전화도 안 되고... 저 아저씬 또 뭐고..." 하며 능청스럽게 연기를 했다. 그리고는 휴대폰을 들어 어른 남자와 소라를 한 프레임에 담아 사진을 찍었다. "아저씨. 이거 바로 인터넷에 올라갑니다? 댁에서 사모님과 아이들이 보겠네요. 아니 어떻게 미성년자 하고 이런 델 들어와요..." 이렇게 나가면 대부분 어른 남자는 원하는 게 뭐냐고 물었다. "원하는 게 뭐 있겠어요. 아저씨 같은 미성년자 밝히는 어른들을 감방에 보내는 거죠..." 아이들은 작업을 거듭할수록 연기가 늘었다.
대개는 현장에서 계좌이체로 돈을 받았다. 몇 차례 작업이 이뤄지는 동안 한 번도 신고는 없었다. 준호가 말하길, 절대로 같은 지역에서 두 번 이상 하면 안 되고, 같은 모텔에 두 번 이상 들어가면 안 된다고 했다. 작업이 한 번 끝나면 소라가 가장 힘든 역할이었다고 하면서 적으면 오십만 원에서 많을 땐 이백만 원을 나누어 주었다. 영식이는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씨름 선수였다고 했다. 키가 무척 크고 근육질에다가 목소리도 걸걸했다. 누가 봐도 20대 후반의 얼굴과 목소리였다. 영식이는 "내 얼굴 이렇게 생긴 게 이런 일 하라고 부모님이 만들어주신 거야."라며 능청스럽게 웃었다. 소라는 '잘하면 이 작업으로 연기 학원에 낼 수강료도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 소라야. 처음에는 떨리고 힘들었지만 몇 번 거듭하니 나도 연기가 늘었고, 남자 애들도 점점 더 능숙하게 일을 처리했어. 여러 번 이래도 되는 걸까 생각했지만 미성년자를 찾는 남자 어른들은 좀 혼이 나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어. 한 번 그렇게 당하면 다음부턴 절대로 그런 짓을 안 하겠지? 난 준호, 영식 오빠와 함께 생활했어. 돈이 생기니까 세탁기, 냉장고가 다 설치돼 있는 오피스텔을 월세로 얻었어. 주인은 만날 필요도 없고 부동산에서 계약을 도와주었어. 영식이가 자기 형 이름으로 계약을 했어. 부동산의 중개사는 신분증을 보자는 말도 하지 않았어. 요즘 워낙 불경기라 들고 나는 것이 한 달에 손을 꼽을 정도였다면서 계약서를 써주었어. 주로 준호가 소개팅 앱에서 남자 어른을 물색했어. 내 사진은 계속 바꾸었고, 화장을 짙게 하니 미성년자로 보이지 않았어. 가명을 써서 'XX 만남 원함'이라고 올리면 금세 남자 어른이 나타났어.
그날도 습관처럼 어른 남자 한 명을 물색하여 작업에 들어갔어. 모텔에 들어가자마자 방호수를 찍어서 영식 오빠에게 보냈어. 그런데 5분이 지났는데도 들어오지 않았어. 나는 더럭 겁이 났어. 남자 어른이 "미나는 몇 살이야?"라고 물었어. 난 "몇 살로 보여요?" 하면서 태연한 척했어. "이십 대 중반? 그런데 완전 동안이네. 난 이런 여자가 좋아"라며 웃었어. 소라가 시간을 끌고 있었지만 십오 분이 지나도 영식 오빠는 소식이 없었어. "아저씨, 저 급한 전화 한 통만 할게요."라고 하고 영식 오빠에게 전화를 걸었어. 오빠는 받지 않았어. 아마 무슨 일이 생겼나 봐. 난 초조하고 불안했어. 욕실에 들어갔던 남자 어른이 소라 쪽으로 다가왔어. 너무 무서웠어. 외삼촌의 얼굴이 떠올랐어. 다시 지옥 같은 시간이 흘렀어.
난 영식 오빠에게 전화를 걸고, 카톡을 넣었지만 전화를 받지도 메시지를 읽지도 않았어. 준호에게도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어.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점점 불안감이 커졌어. 식당에 들어가 늦은 저녁을 먹고 있는데 영식 오빠에게서 카톡이 왔어. '소라야, 집으로 들어가지 마라. 그리고 빨리 피해. 서울로 가는 것이 좋겠어'라는 메시지였어. 아마 더 나쁜 어른을 만나서 곤경에 처한 것 같아. 난 부천역으로 가서 전철을 타고 서울로 향했어. 또 찜질방과 가출팸을 전전했어. 무슨 일이 있었겠니. 그런 아이들의 생활은 다 비슷비슷해. 알바를 하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먹고살기 위해 성매매를 하는 아이들도 있었고 심지어 마약을 하는 아이들도 있었어. 모두들 내 얼굴을 보고는 '큰돈 벌어보자'면서 꼬였어. 어른들과 연결된 아이들도 있었어. 그중에는 자기도 모르게 빚을 지고 그걸 갚기 위해 원하지 않는 일을 하는 아이들도 있었어.
지영아 그 겨울은 정말 춥고 길었어. 나에게 봄은 없었던 것 같아. 사계절이 모두 겨울이었어. 원래 내가 추위를 많이 탔잖아. 난 늘 추웠어. 이 겨울이 지나면 너를 볼 수 있을까. 정미 언니와 함께 있었다면 난 너를 만나려고 했을 거야. 그러나 어디에도 정미 언니 같은 사람은 없었어. 무엇을 먹을지, 어떻게 생활할지 아이들끼리 결정하고, 공동으로 생활비를 부담하고, 갈등이 있을 때는 정미 언니가 잘 해결해 주고... 그때의 생활로 돌아가고 싶지만 이젠 그럴 수 없어.
혼자 남은 모텔에서 소라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지영이와 정미 언니의 얼굴을 떠 올렸다. 지영이와 함께 했던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이 필름처럼 지나갔다. 이어서 정미 언니와 함께 생활했던 시간이 스쳤다. 소라는 '그건 현실이 아니고 잠시 꿈을 꾼 것일지도 몰라'라고 생각했다. 다시는 그런 시간이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니 너무 쓸쓸했다. 소라에게 겨울은 끝나지 않는 계절이었다.
소라의 겨울, 끝
작가의 말
'소라의 겨울'은 '춤을 추다'와 연결된 이야기다. '춤을 추다'의 씩씩한 분위기 속에 조금씩 보였던 불안감이 '소라의 겨울'에서 드러났다. 엄마와 동생 둘을 보살폈던 지영이와 정미 언니와 함께 했던 소라의 시간은 실제로 존재했을까. 지영이, 정미 언니의 존재를 비현실적으로 여기는 현실이 슬프다. 사춘기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묻고 있다. "여전히 세상은 살만한가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