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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성은 Dec 26. 2023

#10. 사, 칠 그리고 팔

아르코문학창작기금 단편소

   내가 퇴근하는 시간대의 버스 안은 한산했다. 나는 제일 뒷좌석에 앉아서 유리창을 손끝으로 톡, 톡 두드리며 이 겨울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가늠해 보고 있었다. 이번 겨울에는 유독 눈이 많이 내렸다. 눈이 펑펑 내리면 세상이 흐려진다고 생각했는데, 그 반대였다. 사람들의 걸음이 느려지고, 자동차도 느려졌다. 그래서인지 하루하루가 보다 선명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종종 카센터 사장과 술을 마셨다. 정 배우는 아직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얼마 전에는 차가 스스로 멈춰버린 바람에 이제는 보내줘야 한다는 걸 받아들이게 되었다. 봄이 오면 내가 직접 폐차장까지 몰고 가겠다는 결심이 섰다. 그래서 봄이 오지 않길 바라는 중이기도 했다.

   신호를 받은 버스는 건널목 앞에서 정지했다. 그 순간 나의 시선은 유모차를 밀고 가는 한 여자에게 향했다. 검은색 롱패딩을 입은 그녀는 잠시 멈춰 서더니 방한 커버를 덧씌운 유모차의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이런 순간을 상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막상 그 풍경을 보자 숨이 가빠왔다. 그녀는 이제 한겨울에 외따로 서 있지 않았다. 나는 그해 겨울의 입김과 초조한 봄의 아침과 오지 않을 것만 같던 여름의 조각들을 떠올렸다. 버스는 천천히 차선을 옮기며 속도를 높여 나갔다. 나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팔 초가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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