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성은 Dec 26. 2023

#9. 사, 칠 그리고 팔

아르코문학창작기금 단편소설

   하나둘 단골손님이 생겨났다. 그들은 내게 안부를 묻고, 일상을 공유하고, 책이나 영화를 추천하기도 했다. 한 손님이 필름클럽이라는 팟캐스트를 추천해 주었고, 그 뒤로는 책장을 정리하며 듣게 되었다. 그 방송의 주제는 <애프터 양>이었다. 진행자들은 영화 속 장면을 세세하게 떠올리게 해주었다. 나는 류이치 사카모토가 병중에 있다는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었다. 그러고 나온 테마가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이었다. 진행자가 그 영화의 OST 앨범명이 ‘호흡’이라고 마치 나를 겨냥한 듯 말해 주었을 때, 나는 순간적으로 희주와 함께 본 마지막 영화가 <애프터 양>이 아니었음을 기억해 냈다. 희주는 그걸 알고 있었을까.

   그날은 무슨 이유인지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졸기 시작했다. 깨고 나서도 잠깐은 여기가 어딘지 잊을 만큼 깊이 잠들어버렸다. 영화는 거의 결말에 이른 듯했다. 무슨 내용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옆자리를 힐끔 보자 희주도 고개를 푹 숙인 채 잠들어 있었다. 나는 희주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도 희주는 깨어나지 않았다. 몇몇이 기지개를 켜며 극장 밖을 빠져나갔다. 극장의 불이 켜졌고, 직원이 영화가 끝났다고 말해 줄 때까지도 정말이지 희주는 영영 깨어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내가 깨울게요, 라고 입엣말을 하자 직원은 무심히 돌아섰다. 나는 손톱 끝으로 희주의 어깨를 조심스레 두드렸다. 희주가 깨어난 건 그러고서도 한참 후였다. 그날이 희주와 영화를 본 마지막 날이었다. 영화는 제목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오후에는 일찍 문을 닫고 카센터로 향했다. 그러나 카센터에는 그가 보이지 않았다. 작업복을 입은 중년 남성이 낡은 세단의 엔진룸을 살피고 있었다. 그가 이 가게의 사장인 듯 보였다.

   엔진오일을 교체하고 싶은데요. 혹시 수염 기르던 젊은 분은 어디 가셨나요?

   아, 우리 정 배우? 만나기 힘들걸요. 나도 소주 한잔하려면 몇 주 전에는 예약해야 하거든요.

   사장은 보닛을 들어 올리더니 재빠르게 엔진오일을 점검했다. 더불어 워셔액과 와이퍼까지 서비스로 갈아 주었다. 그 바람에 커피 한잔하라고 가볍게 건넨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 그는 나를 사무실 옆 창고로 이끌었다. 창고는 입구에서부터 양옆으로 타이어가 층층이 쌓여 있었다. 그는 그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안쪽에서 그가 나를 불렀다.

   이리 와 보세요.

   벽처럼 쌓인 타이어 사이로 희미하게 빛이 새어 오고 있었다. 조금 더 들어가자 안쪽으로 넓은 공간이 나왔다. 창고 안은 어두컴컴했지만 그가 거기에 서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사장이 불을 켜자 파바밧 하면서 천장에 형광등이 켜졌다. 창고의 깊숙한 끝은 막힌 공간이었다. 그곳에는 나무 책상 하나가 오래된 유물처럼 놓여 있었다. 책상 위의 벽에는 몇 장의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놀랍게도 나의 얼굴이 담긴 포스터도 있었다. 십오 년은 더 지난 것이었다. 나는 연극 동아리의 동계 워크숍에서 <에쿠우스>의 알런을 연기했었다. 일곱 마리 말의 눈을 찌른 열일곱 살의 광기 어린 배역이 나의 시작이었다. 그 포스터 옆에 다른 포스터들도 붙어 있었다. 우리 극단에서 기획한 창작극의 포스터였다. 거기에는 이현의 얼굴이 자그맣게 인쇄된 포스터도 있었다.

   좀 누추하긴 해도 이 방이 우리 정 배우의 연습실입니다. 연극영화과에 지원하고 싶다고 그렇게나 떼를 썼는데, 내가 말렸어요. 그래도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학비도 준비해 놓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입시 학원인가 어디 극단인가에서 여자친구를 만난 모양인데…. 저도 참 예뻐했거든요. 여기서 데이트도 하고 그랬을걸요. 그런데 그렇게 되어버렸어요. 모든 게 다 끝나버렸어요. 그 뒤로는 가게에 와서 일을 열심히 배우더라고요. 그래서 몇 년 동안 일을 가르쳤죠. 그런데 혼자서 가게 운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능숙해지고 나니깐 냅다 토껴버리는 겁니다. 해야 할 일을 찾았다면서요.

   그가 기어코 그 포스터를 가리켰다.

   이 사람 맞죠? 정 배우가 말예요, 여기 이분이 대학에서 학생들 가르치는 선생님인데, 우리 가게에 왔다고 그러더라고요. 자기가 엔진도 손봐 주고, 타이어도 수리해 줬는데, 얼마 안 있어서 또 오게 될 거라고, 차가 좀 낡았다고 하더라고요. 무슨 차인지 어떤 문제가 있는지 일일이 알려 줬어요. 이젠 엔진소리만 들어도 다 아는 애거든요. 근데 그 애가 그러데요. 무대에선 어떨지 몰라도 평상시엔 연기력이 꽝이더라고. 뭔가 얘기하고 싶어서 온 거 다 보이는데 아닌 척하고 있더라고요.

   그는 장갑을 바짓단에 툭툭 털더니 이어 말했다.

   커피 말고 이담에 소주나 한잔합시다. 한번 들러요. 정 배우도 내가 불러낼 테니까.

이전 08화 #8. 사, 칠 그리고 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