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성은 Dec 26. 2023

#8. 사, 칠 그리고 팔

아르코문학창작기금 단편소설

   카센터를 다시 찾은 건 차에 별다른 문제가 생겨서는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모자를 눌러쓴 채 담배를 꼬나물고 있었다. 내가 차에서 내리자 급히 꽁초를 튕겼다. 나는 자동차를 점검받고 싶어 왔다고 말했다. 그는 한 시간 정도 걸릴 거라고 했다. 나는 가까운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카센터로 돌아왔다. 그는 아무래도 구형 SUV 같은 경우는 엔진의 절반이 무쇠이다 보니 녹이 슬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쯤 되면 냉각수와 부동액도 주기적으로 신경 써 줘야 한다며 녹물을 빼내고 새 걸로 교체해 두었다고 알려 주었다. 그러나 이 차는 아직 노인정에 갈 시기는 아니라며 슬며시 미소를 내어놓을 때, 그가 이현의 남자친구였다는 사실이 다시금 생생해졌다. 그는 자동차도 제 나이대의 멋이 있으니 가급적 오래 타고 다녀 달라고 넉살 좋게 말했다.

   오래 타면 영업에 도움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모르시는 말씀이세요. 부품마다 정해진 수명이 있거든요. 그 기간이 똑같으면 좋을 텐데, 하나하나 다 달라요. 제아무리 작은 캡이라도 완전히 마모되기 전에 갈아 끼우는 게 안전하니까 자주 와주세요.

   시동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느낌 탓인지는 모르지만 차는 전보다 부드럽게 나아갔다.

   나는 결국 이현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사정을 묻지 못했다. 이유를 알고 나면 내 안에 가까스로 남아 있던 작은 불씨가 완전히 꺼져버릴 것 같아서였다.     


   오픈 준비 중인 서점에 나타난 건 태석이 형이었다. 태석이 형은 서점을 천천히 둘러보더니 그 자리에 서서 책장 하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여덟 평의 작은 서점 안에는 태석이 형과 내가 전부였다. 책을 사러 온 건 아닌 듯싶었다. 태석이 형이 책을 둘러보는 동안에 나는 여름도 벌써 지나가는구나, 생각했다.

   태석이 형은 책장에 빽빽하게 꽂혀 있는 책들을 한 권도 꺼내어 보지 않았다. 그저 책등에 적힌 제목과 작가의 이름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집중해서 읽어 나가는 것 같았다. 마침내 모든 책등을 꼼꼼하게 읽은 뒤에는 테이블 위에 올려둔 엽서를 이리저리 살폈다. 서점에서 나가기 전에는 차양에 가려 비스듬히 떨어지는 햇살의 조각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나는 이틀 뒤에 서점을 오픈했다. 오픈이라 해도 거창할 건 없었고, 입간판 하나를 문 앞에 두는 정도였다. 나는 종종 태석이 형이 찾아온 일을 떠올렸다. 어쩌면 내게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알려주기 위해 왔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도 확신할 수 없었고, 어떤 것도 단정할 수 없었다. 나는 종종 사를 세며 숨을 들이마셨다가, 칠을 세며 숨을 멈추었다.

이전 07화 #7. 사, 칠 그리고 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