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코문학창작기금 단편소
나는 희주와 주고받았던 문자 메시지를 다시 한 번 읽어보았다. 거기에는 거리를 좁히지 못한 감정의 흔적들이 증거처럼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정도로 희주의 행동을 납득할 수는 없었다.
희주는 세이렌에서 나이가 제일 어렸다. 뒤늦은 유학 준비를 위해 영어 공부와 카페 아르바이트를 병행하고 있다고 했다. 처음 모임에 참여한 나를 위해 으레 하는 인사 같은 거였다. 나는 한때 연극에 몸담았다가 지금은 ‘연극의 이해’라는 교과목을 가르치는 강사라고 소개했다. 우와, 하는 탄성이 새어 나왔고 누군가 사귀어라, 사귀어라 하는 짓궂은 장난을 쳤다. 그때 희주에게 영국에서 유학 중인 남자친구가 있다고 떠벌렸던 사람이 태석이 형이었다.
금요일 아침까지도 희주와 연락이 닿지 않았다. 종합병원의 생경한 느낌이 더는 낯설게 다가오지 않았다. 나는 익숙하게 6층 신생아 중환자실로 향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일회용 비닐 가운을 입고 면회 시간을 기다렸다. 나는 휴대전화의 액정을 재차 확인했다. 그리고 마침내 간호사가 면회의 시작을 알리는 그때, 아기의 몸무게를 정리해 둔 게시판을 힐끔 쳐다보았다. 거기에 서희주 아기의 이름이 보이지 않았다. 아기가 누워 있던 인큐베이터 2호기는 비어 있었다. 나를 알아본 간호사가 의아한 눈으로 아기는 어제 다른 병원으로 전원을 갔다고 말해 주었다. 나는 난처해하는 간호사의 얼굴에서 어떤 실마리를 발견해 내고 싶었다. 간호사는 자세한 건 엄마와 연락해 보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문은 차갑게 닫혀버렸다. 아기는 거기에 없었다. 내 역할은 거기까지였다.
전세 계약 기간이 만료되어 집주인과 이사 날짜를 협의했다. 다음 작품에서 조명이라도 잡아 보지 않겠냐는 선배들의 제안도 뜸해지다가 완전히 끊겼다. 술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정신이 곧잘 혼미해졌다. 낮과 밤의 구분이 흐릿해져 갔다.
학기가 끝나자마자 담당 교수님이 나를 연구실로 불러냈다. 강의 평가 때문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내가 속해 있던 극단의 창립멤버였으며, 내가 극단을 나가게 된 일을 안타깝게 여겨 품어준 분이었다. 나는 아무래도 연극을 가르칠 자격이 없는 것 같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사칠팔 호흡법 기억하고 있는가?
그건 그가 전파한 일종의 준비운동 같은 것이었기에 제자들이라면 모를 수가 없었다. 사 초 동안 코로 숨을 들이마시고, 칠 초 동안 숨을 참고, 팔 초 동안 입으로 내뱉는 호흡법이었다.
내가 그 숨을 공부한 게 자네 나이 즈음이거든. 헌책방에서 고서를 고르고 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온 거야. 무지렁이 같은 나는 그만 책을 들고 서점을 뛰쳐나갔지. 장례를 치르고 나서라도 그 책을 돌려드렸으면 좋았을 텐데, 어디 간 건지 당최 뵈지 않는 거네. 제목도 기억이 안 나. 그래도 값은 치러야지 싶어 이실직고했다네. 그러자 그 집 할배가 턱 하니 �삼백육십다섯 가지 호흡법�이라는 책을 내주는 거네. 호흡법이 자그마치 삼백육십다섯 가지라니.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지. 어떻게든 숨만 쉬면 살아지는 줄 알았으니까. 그 책을 들고 돌아가서 공부를 시작했지. 그러다 내게 딱 맞는 호흡법을 발견한 거네. 요를 말하자면 사칠팔은 내 것이야. 아무리 따라 하려 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라고. 정 가져가고 싶으면 사칠만이라도 가져가 봐. 그다음에 팔은 저절로 오는 수가 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