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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소연 Jul 02. 2023

내가 가장 자유로웠을 때

자유에 대한 감각 회복하기. 단 한 번이라도 나 자신이 ‘자유롭다’라고 느끼고 생각한 적이 있었던가? 단 한 번도 그런 순간이 없었다고, 그래서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실체도 감각도 없는 ‘관념’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자유라는 막연한 관념보다 억압과 침묵에 대한 기억, 참고 인내하고 견디는 일이 더 익숙하고 구체적으로 손에 잡히는 일 아닐까, 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나 역시 마흔두 살의 어느 지점을 통과하면서 자유가 무엇인지, 그것을 손에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방향 감각을 완전히 잃은 시기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있었다. 그럼에도 누군가 나에게 당신이 가장 원하고, 갈망하는 것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자유’라고 말할 것이 분명했다. 그럼 다시 당신이 원하는 자유가 구체적으로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일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자유, 하면 역설적으로 내 몸에 새겨져 조각나고 해체된 기억의 파편들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어린 시절 외갓집으로 가던 밤길에 우연히 피어나는 달맞이꽃을 봤을 때, 송아지를 따라 산속을 뛰어다닐 때, 한겨울 짚불 더미 속에 들어앉은 암캐와 그 새끼들 사이에 파고들어 서로의 체온과 온기를 나누었을 때, 친구들이 모두 떠난 놀이터 그네에 앉아 저녁노을을 발견했을 때, 리어카를 끌고 대학 교정 언덕길을 신나게 뛰어 내려올 때, 섭지코지에서 겨울바람을 맞으며 수평선을 바라볼 때, 태어나 처음으로 탄 비행기가 힘차게 이륙할 때, 벨기에의 어느 마을 성곽 위에서 붉어지는 태양을 바라보았을 때, 그때 사랑하는 이와 눈이 마주쳤을 때…….    

반대로 억압에 대한 감각은 입시 학원에서 영어 선생님의 강의가 귀에서 이명처럼 울리고 온몸이 뒤틀리고 간질거려 뛰쳐나가고 싶은데 붙박이처럼 앉아 있었을 때, 우유를 마시면 늘 배가 아픈데 배가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고 수업이 끝날 때까지 참아야 했을 때, 삼촌들이 자신의 성기에 나의 손을 이끌어 주무르게 했을 때, 어머니에게 그 사실을 말하지 못했을 때, 골목길에서 한 남성이 갑자기 손을 뻗어 나의 가슴을 만지려 했을 때, 지하철에서 한 남성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나의 허벅지를 더듬을 때, 그 사실을 바로 옆의 아버지에게 말하지 못했을 때, 바닷가로 놀러 가자던 학원 원장에게 강간을 당했을 때, 그가 나의 손에 오만 원권 몇 장을 주었을 때, 고기를 못 먹는데 회식 자리에서 사람들이 고기를 먹고 있을 때, 아침저녁으로 체중계에 오를 때……      

나는 손에 잡히는 자유의 감각을 되찾고 싶을 때면, 그 모습에 가장 유사하게 다가간 여성 예술가나 작가들을 찾아다녔다. 말년의 조지아 오키프는 뉴멕시코의 고스트 랜치에 정착해 살면서 사막과 꽃과 동물의 유골들을 그렸다. 흰머리를 정갈하게 틀어 올린 채 사막의 지평선을 바라보며 서 있는 그녀의 모습에서 스티글리츠의 연인으로 누드사진으로 등장해 세상에 알려진 젊은 시절 모습을 찾아보기란 어렵다. 그녀가 매일 바라보던 사막의 페더널 산을 두고 나바호족 인디언들은 “대지와 시간을 상징하는 ‘변화시키는 여자’의 탄생지”라고 말했다.(헌터 드로호조스카필프 지음, 이희경 옮김, 『조지아 오키프 그리고 스티글리츠』, 민음사, 2008, 469쪽)     


어떤 면에서 패더널은 오키프가 진정한 여자로, 독립적인 여자로, 대중이 그녀의 작품뿐 아니라 자신의 규칙에 따라 살기로 한 선택까지도 존중하는 여자로 태어나게 해 주었다.   

- 같은 책, 469쪽  


오키프가 이 황무지에서 얼마나 많은 색과 형태들을 발견했고, 얼마나 구체적이고 명징하게 자신만의 색 배합을 만들어냈는지를 살펴보면 나는 조금씩 알 것만 같았다. 그녀가 가리키는 손가락의 방향을 통해 내가 가야 할 지평선이 보이고 삶에 대한 방향 감각을 되찾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오키프는 우리가 숨기고 싶어 하고 수치스럽게 여기는 ‘여성성’을 붓꽃으로, 카라로, 양귀비로, 접시꽃으로 전면에 내세워 그렸다. 그것이 그녀가 가진 대담함이자 용기였다. 여성성은 가장 순수하고 단순화된 형태와 색의 조합으로 제시되었다. 그것은 어떤 윤리도 가치도 편견도 개입될 여지가 없는 ‘온전한 세계’일 뿐이었다.

시간과 돈으로부터의 자유를 얻는다면 그것으로 우리의 자유는 완성되는 것일까? 여기서 물리적 차원의 자유는 의식 차원의 자유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맹목적인 의지(욕망)는 지성으로 극복될 수 있고, 우리가 일상에서 추구해야 하는 것은 ‘(명랑한) 인격과 건강’뿐이라고 말했다. 특히 여성의 몸을 둘러싼 사회적 층위의 욕망들(아름다워야 하고, 늘씬해야 하고, 사랑스러워야 하고, 순결해야 하고, 일과 가정에 충실한 슈퍼 우먼이어야 하고…)은 우리의 몸을 강력히 통제하고 억압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이런 억압 기제는 결국 육체의 질병이나 마음의 질병으로 나타난다. 우울증, 불안장애, 폭식증, 거식증, 자궁질환, 쇼핑중독, 연애중독, 운동중독 등등.      


의식 차원의 자유로 가기 위해 우리는 우선 ‘말해야’ 한다. 말하지 못했던 것을 말하고, 밖으로 드러내어 밝히고, 어떤 행위로든 표현하고, 그것을 공유해야 한다.      


"성공하느냐 못 하느냐는 관계없습니다. 그런 건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죠. 내 안의 미지의 세계를 알리는 것, 그것이 중요합니다. …… 그리고 그 미지의 것을 항상 저 너머에 두는 것이 중요해요. 인생의 비전을 좀 더 단순하고 투명하게 이해하고 구체화하면…… 결국 희미하게 예감하는 것과 비교해 그것이 진부해지는 것만을 알아차릴 따름이지만……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늘 작업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 같은 책, 312쪽   


말하지 못하던 것을 말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상처를 전시하는 것이 아닌, 객관화하고 관찰하고, 기록할 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병든 상태를 ‘인식’하기 시작한다. 우리의 질병으로 자신의 아픔을 명료하게 인식하고, 설명하고, 표현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해하기 시작하면 치유되기 시작한다. 치유된다는 것은 자신의 내부에 들어찬 슬픔의 덩어리를 낱낱이 풀어 헤치는 작업이다. 이 덩어리를 분해하고 해체하고 나면 나만의 ‘미지의 세계’가 드러난다. 이 과정을 통해 자신을 구체적으로 납득하기 시작할 때 자신을 공격하던 내부의 문제로부터 해방되고, 나의 미지의 세계는 타인과 연결되는 통로가 된다. 이 통로를 통해 우리는 타인을 향해 손을 내밀 용기를 낼 수 있게 된다. 다른 이의 목소리가 곧 나의 목소리가 된다. 이 세계를 향해 ‘열리는’ 연결감 속에서 우리는 자유를 향한 느리지만 단단한 한 걸음을 내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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