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안다고 믿는 모든 것과, 고통에 대한 그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필연성에 대한 진부한 모든 말들을 전염병처럼 피해야 한다는 것을. 또한 나는 깨달았다. 삶과 마찬가지로 죽음에 있어서도 다른 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아야 하며, 죽음을 말할 때는 사랑을 이야기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열정 어린 목소리로 말해야 한다는 것을. 죽음의 고유한 특성과 사랑의 감미로움에 어울리는 세밀한 언어를 선택해야 한다는 사실을.
-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김도연 옮김, 『그리움의 정원에서』, 1984Books, 2021, 34쪽
어머니와 연인을 자살로 잃은 후에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들의 죽음은 나의 몸속에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황무지를 형성했다. 그 황무지는 각각 남반구와 북반구에 있는 황무지처럼 외따로 떨어진 영토들이다. 나는 두 개의 황무지를 건너오면서, 그 죽음이 얼마나 처참했는지, 얼마나 비극적이었는지를 말하기보다 그것이 나에게 보여준 풍경을 말하고 싶었다. 내가 어머니의 황무지에 들어서서 멀리 뜬 달을 바라보면 그 달은 아주 부드러운 빛으로 내 몸을 감싼다. 고통도 슬픔도 없는 그 영원한 대지. 밤과 고독과 침묵의 세계. 연인의 황무지로 들어서면 그곳은 영원한 밤의 세계로 나를 이끌어 간다. 어둠이 강물처럼 굽이칠 때 그 아래 언덕에서는 이따금 이리 한 마리가 나타나 섬광처럼 눈을 번뜩이는 곳. 그들과 눈을 마주치면 나는 내가 삶과 죽음의 비밀을 품은 신들의 세계로 들어선 것을 알게 된다.
나는 당신들의 죽음으로 인해 그 세계를 골똘히 바라보는 일이 잦아졌다. 이제 나는 자살 충동에 빠져들지 않는다. 다만 나는 당신들의 죽음을 새를 어루만지듯 오랫동안 공들여 만져본다. 황무지에 부는 모래바람을 온몸으로 맞고 있으면 당신들의 존재가 내 몸을 통과해 간다. 당신들은 바람이 되었다가, 빛이 되었다가, 돌멩이가 되었다가, 밤의 어둠이 된다. 죽음을 통해 나는 당신들의 삶을 바라본다. 그것은 거울처럼 서로를 비추고 있다. 나는 두 개의 세계를 오고 가며 이승의 사람도 저승의 사람도 아닌 이방인이 된다. 그 속에서 오래도록 쓸쓸하고 싶었다. 오로지 당신들을 기억하기 위해 태어난 자처럼.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건너온 말들을 전하기 위해 태어난 자처럼.
세상에서는 자살한 사람의 주변에 남겨진 이들을 자살 생존자, 유가족 또는 사별자 등 여러 명칭으로 부르고 있다. 특히 심리부검에서 일컫는 ‘자살 생존자’란, 그 남겨진 이들이 자살 고위험군으로 분류되어 높은 확률의 죽음의 위험으로부터 ‘살아남은 자’란 의미를 담고 있다.
나는 자살을 도덕적으로 규탄하거나 조용히 규탄해서는 안 되는 자유로운 행위로서 생각해볼 여지를 열어보고 싶다. 자살은 이해되어야 하며, 자살에 대해 더 성숙하고 관대하며 성찰적인 논의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자살에 대한 논의 전체가 격렬한 분노에 사로잡히는 일은 너무나 흔하다. 자살한 사람의 배우자와 가족, 친구들은 자살에 대하여 논의하려는 어떤 시도든 이해할 만한 분노로 반응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는 용기를 내야 한다. 우리는 이야기해야 한다.
- 사이먼 크리츨리 지음, 변진경 옮김, 『자살에 대하여』, 돌베개, 2021, 38~39쪽
내 몸에 찾아온 자궁내막증이란 질환은 상실과 죽음의 유혹, 과중한 업무, 죄책감과 깊이 침묵해야 했던 시간들과 연결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몸은 트라우마를 견디고 살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흔적은 우리의 몸에 고스란히 간직된다. 아픈 채로 살아가는 것, 아픈 채로 용기를 내어 이야기하는 것. 죽음에 대하여, 자살에 대하여 말하며 금기된 영역을 뛰어넘는 것, 좀 더 세밀하고 적확한 언어들을 발견해 나가는 것, 내 몸의 아픔들을 통과한 언어들이 죽음에서 삶으로 나아가는 것. 나는 그런 것들을 희망한다.
그리하여 나는 ‘자살 생존자’는 ‘질문하는 자’로 변화해 간다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이의 상실은 우리를 끔찍이도 압도하며 무너뜨리려 찾아오는 거대한 파도와 같다. 온몸으로 그 파도에 맞설 때, 내 몸이 투명해지는 것을 느낀다. 슬픔이, 아픔이 사라질 때까지 파도를 맞고 서 있어 보는 것이다. 그 파도를 맞고 서 있으면 삶이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 나는 당신을 왜 사랑하는지, 무엇이 당신을 고통에 빠뜨렸는지, 그 죽음마저도 나는 왜 사랑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시작된다. 그것이 살아남은 자가 질문하는 자로 변모되는 순간이다. 질문을 멈추지 않는 동안 살아 있게 된다. 질문함으로써 죽음을 유보한다. 폐허 위에 서서 질문으로써 씨앗을 심는다. 그 무수한 질문들이 내 삶에 뿌리내리고 나무의 싹이 나고 숲을 이룰 때까지. 그 질문들의 뿌리는 사랑이다. 당신을 사랑하는 한 나는 질문한다. 당신에 대한 끊이지 않는 질문이 나를 살게 한다. 나는 살아서 오래도록 당신에 대해 묻겠다. 당신이 살아 있을 때 하지 못했던 것. 그것이 내가 받은 천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