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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소연 Jun 29. 2023

영혼의 품위를 지키는 일

오전에는 자궁내막종 수술을 받았던 병원에서 정기 검진을 했다. 수술한 지 약 1개월이 지난 시점이었고, 결과는 정상적이었다. 나는 검사 전까지 비교적 긴장해 있었지만, 설령 결과가 안 좋게 나왔다 하더라도 호르몬 치료는 계속해서 거부할 생각이었다. 네이버 카페에서 자궁질환을 가진 여성들의 이야기를 읽었고, 나와 같은 자궁내막증 환자 여성들 몇몇 분들과는 서로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주고받았다. 특히 이곳에 만난 한 여성은 자궁내막증이 두 번째 재발한 상황이었고, 자궁경부암까지 발견되어 병원에서 자궁 적출 수술을 권유받았다고 했다. 그녀는 40대였고, 미혼이었는데 병원에서 다른 치료 방법도 제시하지 않고 곧바로 적출 수술부터 권유받은 것에 적잖이 당황하여 다른 병원의 의사들도 알아보는 중이라고 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도움을 주고 싶어 자궁 난소 보존 치료를 우선적으로 하고 있는 의사의 유튜브 영상을 찾아 공유해주었다. 그녀와 내가 공감한 부분은 의사에게 내 몸을 전적으로 내맡기기보다 우리가 의지를 가지고 나와 맞는 의사를 찾아야 하고, 이 질병에 대해 스스로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카페는 아주 실질적인 조언을 필요로 하는 공간이기에 그녀에게 차마 하지 못한 말들이 있는데, 자기 질병에 대해 공부하면 할수록 자기 몸과 마음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나는 조금만 더, 참을 수 있어, 아직은 아니야, 하면서 갑갑한 조직 생활을 버텨왔다. 그때 내 몸과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더 이상은 못한다고 절규하고 있는 것을 나는 민감하게 포착하지 못했다. 이 질병이 아니었다면 나는 내 몸이 내지르는 비명을 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질병은 내게 찾아온 스승이자 귀한 손님인 것이다. 

문득 사무실에서 고개를 들고 주변을 돌아봤을 때 내 책상에는 서류더미로 가득했고, 사람들은 침묵 속에서 일만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여기는 카프카적인 악몽의 세계다.’ 직장에서 모욕적인 일을 겪을 때 나는 허수경 시인의 말을 떠올렸다.     


나는 치욕스러울 때면 언제나 꽃을 피웠지.     

 - 허수경 지음, 『가기 전에 쓰는 글들』, 난다, 2019, 29쪽


나는 치욕스러울 때면 어머니를 생각했다. ‘나는 내 어머니가 이 세계의 치욕을 견디며 키워낸 사람이다’ 하고 중얼거려 보았다. 어머니는 자신의 결혼반지를 팔아 나를 대학에 보냈고, 나를 더 넓은 세상으로 내보냈다. 그녀가 열네 살의 나이에 홀로 집을 나왔을 때처럼 그녀가 삶에 대해 가졌던 열망이 나를 더 먼 곳으로, 더 넓은 곳을 향해 돛대를 펼치고 나아가게 한다. 그러므로 내가 세상의 치욕을 견디는 방법은 어머니를 떠올리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목숨을 담보로 지금의 내가 살아 있다. 그러므로 나는 치욕에 무너지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어떤 치욕은 우리 영혼의 품위를 시험한다. 그럴 때 자기 안에서 꽃을 피우는 것. 나를 살릴 그 꽃과 같은 존재의 기억들을 불러들이는 일. 그녀를 기억하는 일에서 나는 살아감의 상처에 연고를 바른다. 

치욕을 이기는 건 사랑이다. 지금은 없는 어머니의 결혼반지, 그 작은 동그라미를 떠올리면 치욕도 삼켜진다. 응급실에서 차가운 알몸으로 식은 어머니는 금반지가 아닌 청동빛으로 바랜 싸구려 반지를 끼고 있었다. 그 싸구려 반지의 동그라미가, 그 마음이 나를 키워낸다. 어머니의 굳은 손가락에서 그 반지를 빼내던 날, 나는 영원히 그 동그라미를 사랑하게 되었다. 당신의 동그란 마음, 나를 바라보던 그 눈망울의 연민, 그것이 나를 살려낸다. 그 동글한 것들을 마음속에서 굴리며 나는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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