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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소연 Jul 21. 2023

인석 씨가 슬플 땐
황소처럼 운댔어요 (1)

영화 하숙생(1966)과 스토킹 범죄에 대해

영화 <하숙생>(1966)


여기 속절없이 복수당하는 한 여자가 있다. 한국고전영화 <하숙생>(1966) 속의 재숙이란 여성으로, 방직공장에서 함께 일하는 청년 인석과 연인 사이다. 두 사람은 함께 들판으로 나가 데이트를 즐긴다. 인석은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재숙은 자유롭게 춤을 춘다. 재숙은 풀밭 위를 망아지처럼 뛰어다니면서 자신의 꿈에 대해 말한다. 그녀는 미스코리아 대회에 나가 입상하여 외국으로 나가 멋있고 신비스러운 삶을 사는 것이 꿈이라고 말한다. 그녀의 꿈에 대해 인석은 너무 신비롭고 황홀한 것은 비극을 부른다고 말하지만, 재숙은 비극이라도 좋아요, 라고 말한다. 인석은 이렇게 말한다. “난 널 나 혼자서 간직하고 싶은 거야. 네 알몸뚱이를 수많은 관중 앞에서 내보이고 싶지 않아.” 

인석의 대사는 21세기의 관객이 보기에 너무 직설적이고 적나라한 욕망이어서 놀라움과 경악을 금치 못한다. 나는 널 독차지하고 싶어, 라는 말을 돌려 말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돌직구 하는 이 남자라니. 자신의 욕망에 대해 솔직한 것은 재숙 또한 만만치 않다. 인석의 욕망이 남성적 지배 욕망에 기반한 맹목적인 소유욕이라면 재숙의 욕망은 자신의 삶을 화려하게 확장하고자 하는 야망에 가깝다. 인석은 재숙이 꿈을 버리지 않을 경우 곧바로 떠나버리겠다고 말하고, 그 말에 재숙은 순순히 꿈을 포기하겠다고 말한다. 

이 들판 신은 1960년대 영화 특유의 대사와 연기에 손발이 오그라드는 수위가 가장 센 장면임에도 인물들에 대한 강력한 의문을 품게 하는 핵심 장면이다. 인석은 어떻게 여자의 꿈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또 재숙은 어떻게 저리 순종적일 수 있을까? 이들이 단순히 시대의 한계를 대변하고 있는 인물들이기 때문일까? 

인석은 들판의 황소에 자신의 처지를 빗대면서 황소의 울음소리처럼 언제고 재숙을 부를 것이라고 말한다. 남자는 소박하고 알뜰한 삶이야말로 진정으로 행복한 새로운 세계로 가는 길이라 말하고 여자는 황홀한 희망에 젖어서 그가 약속하는 미래로 이끌려간다. 이것이야말로 비극의 시작일 수 있다. 두 욕망의 충돌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앞으로의 전개가 궁금해진다. 여자를 소유하려는 남자와 그 소유당함에 기꺼이 종속되고자 하는 여자의 욕망이 위험할 수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영화는 관객을 조롱하듯 이어지는 바로 다음 장면에서 재숙이 미스코리아 대회에서 당당히 입선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상심한 인석이 공장에서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있을 때 재숙이 꽃다발을 들고 들어와 자신이 자랑스럽지 않냐고 묻는다. 영화는 재숙의 내면에 대해 아무 설명이 없기에 정황상으로만 보면 재숙은 위선의 표상이 된다. 재숙의 성공에 인석은 자신의 초라함에 화가 난다고 말한다. 인석은 지질함의 극단으로, 재숙은 뻔뻔함의 극단으로 치닫는다. 인석이 재숙을 인정하지 않자 그녀는 성냥불을 켜면서 자신의 얼굴에 상처를 내겠다고 위협한다. 인석이 그녀를 말리는 과정에서 성냥불이 화학약품에 튀어 공장에 화재가 발생한다. 인석이 재숙을 공장 밖으로 탈출시키고 그는 그곳에 갇혀 치명적인 화상을 입고 만다. 

재숙은 화마로 몸도 마음도 일그러진 인석을 버리고 떠난다. 인석은 성형외과에서 수술을 받고 회복을 취하는 동안 의사에게 말한다. “나는 정신적으로 살해당한 놈입니다.” 인석은 고통 속에서 더욱 위험한 것을 마음속에 벼려 내게 되는데 그것은 과거의 연인을 자신과 같이 정신적으로 살해하기 위한 칼날을 품는 것이다. 여기에서 21세기 관객은 모골이 송연해지면서 이 영화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나간다. 이후 인석이 보이는 행보는 전형적인 스토킹의 행적이기 때문이다. 인석은 부유한 중년 남자와 결혼한 인숙이 사는 집의 옆집에 하숙생으로 위장하여 들어가고 그곳에서 매일 아코디언을 켠다. 영화는 배경음악으로 최희준의 노래 <하숙생>의 멜로디를 공기처럼 깔아 놓는다. 이 멜로디는 불길한 징조처럼, 안개처럼 재숙의 내면을 죄책감으로 잠식해 들어간다. 그녀는 인석이 지척에 왔음을 단번에 인식하고 그에게 찾아가지만 자신을 괴롭히지 말아 달라고 단호히 말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의 학대를 순순히 ‘받아들인다’. 그것이 사랑했던 남자에게 저지른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석은 재숙을 호텔 방으로 불러들여 강간을 ‘연출’한다. 실제로 인석은 재숙을 강간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석은 재숙의 우위에 서서 권력을 점하고 그녀에게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도록 술을 따르게 하고 자신의 몸을 주무르는 ‘서비스’를 요구하는 등 그녀를 매춘부로 전락시킨다. “한 사나이를 배신했던 여인, 그러나 그 여인은 이제 새장에 갇힌 새처럼 당신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 뭘 더 어쩌자는 거예요!”라고 말하는 재숙의 대사는 절규처럼 들린다. 한때 친밀했던 관계에서 벌어지는 폭력은 피해자가 헤어진 이후 보복에 대한 두려움이나 결별에 대한 죄책감으로 가해자와 관계를 지속하게 되는 상황을 보여준다. 인석의 보복 행위는 2023년의 관객에게는 파멸적 사랑의 행보로 미화될 수도 용납될 수도 없는 명백한 범죄로 보인다.

물론 지금의 사회적 시선으로 1960년대 사회를 재단하는 것은 온전한 일이 될 수 없다. 다만 우리는 한국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1960년대에도, 수십 년이 흐른 2000년대에도 이어지는 어떤 공통된 사회문화적 편린이 영화 속에 내재해 있음을 발견한다. 한국 고전 영화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영화 속에서 여성들이 강간당하는 장면을 셀 수도 없이 목격한다. 이를테면 <남부군>(1990)에서 빨치산이 된 남편이 산으로 도망가자 집에 홀로 남은 여성이 다른 남성에게 강간당하는 장면, 빨치산들이 군경들의 감시를 피해 학교 지하에 숨어 지내는 동안 그 안에 있던 유일한 여성이 집단 강간당하는 장면, <피막>(1981)에서 무녀가 굿을 하러 들어간 양반 집안에서 가장 큰 어르신인 노인과 그 노인의 손자에게 강간당하는 장면, <아제 아제 바라제>(1989)에서 파계당한 여승이 한 남성을 따라 속세로 나가게 되고 그날 밤 그로부터 강간을 당하는 장면 등등. 

여성은 역사적으로 열악한 인권 상황에 처해 있었기에 영화가 서사 전개 과정에서 핍박당하는 여성의 모습을 담아내는 것은 불가피한 표현의 일환일 수 있다. 그런데 195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50여 년이 흐르는 동안 지독히도 변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서사’의 일부로 묘사되는 여성 강간 장면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더디게 여성 인권 성장이 이뤄져 왔는지 엿보게 한다. 오히려 폭력의 양상은 더 다양하게 변모되면서 연애 행위의 일부 또는 애정 구걸 행위의 일환으로 치부되던 스토킹 범죄는 현재에도 심각하게 자행되고 있다. 스토킹처벌법은 1999년에 첫 발의가 된 후 22년 만인 2021년에 시행되면서 한국 사회가 스토킹을 중범죄로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데 얼마나 긴 암흑기를 걸어와야 했는가를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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