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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소연 Jul 22. 2023

인석 씨가 슬픈 땐
황소처럼 운댔어요 (2)

영화 하숙생(1966)과 스토킹 범죄에 대해

영화 <하숙생>(1966)


1966년의 재숙은 나의 할머니였을 수도, 어머니였을 수도, 자매였을 수도 있다. 2019년 진주에 사는 열여덟 살 소녀가 스토커에 의해 살해되었을 때, 2020년 경남 창원에서 작은 고깃집을 운영하던 여성이 스토커에 의해 살해되었을 때, 2021년 서울 노원구의 세 모녀가 스토커에 의해 살해되었을 때, 2022년에 신당역에서 여성 역무원이 살해되었을 때, 같은 해 안동시청 여성 공무원이 살해되었을 때, 2023년에 사찰에서 일하던 여성 신도가 살해되었을 때, 우리는 참혹한 현실과 반복적으로 맞닥뜨려야 했다. 신당역 화장실에 써 붙여진 형형 색깔의 무수한 포스트잇에는 “가해자에게 더 이상 서사를 부여하지 말라”라는 절규도 있었다. 가해자의 신상과 범죄 동기와 병력 등 범죄를 저지르기까지의 개인사에 집중하는 수사와 판결은 피해자의 존재가 완전히 지워져 버린다는 모순을 낫게 한다. 우리는 그녀가 어떤 존재였는지 아무것도 모른다. 우리에게는 단지 죽음만이 놓여 있다.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그 존재 앞에서 우리를 침묵하게 하는 거대한 무기력을 목도하게 된다. 

재숙이 호텔 방에서 인석과 함께 있던 사실은 그 현장을 목격한 재숙의 의붓딸에 의해 폭로된다. 재숙은 남편에게 추궁당하게 되고 그녀는 그 사실을 시인한다. 그것은 그와 같은 공간에 있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인정이었음에도 남편은 그녀가 인석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고 결론 내리기에 이른다. 여기서 재숙이 두 번에 걸쳐 외치는 “사랑하고 있어요! 사랑하고 있어요!”는 가학적 사랑에 빠진 자의 자기기만일까, 아니면 파멸에 도달함을 직시한 자의 자포자기일까? 

그리고 부부의 침실로 또다시 하숙생의 멜로디가 저주처럼 연주된다. 재숙은 그 소리를 인석의 황소울음소리라 여기며 비 오는 거리 속으로 뛰어나간다. 이 장면에서 그녀의 정신과 육체는 완전히 부서졌음을 보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인석은 정신병원의 지하 병실에 감금된 재숙을 ‘확인하러’ 간다. “인석 씨가 슬픈 땐 황소처럼 운댔어요”라는 말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그녀의 죽은 정신을 보기 위해서. 재숙을 바라보는 인석의 눈은 공허하다. 속절없이 복수당한 여자의 육신을 앞에 둔 그 남성은 정신적 살해의 기쁨도, 희열도,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무감의 늪에 깊이 빠져들고 만다. 영화의 시작처럼 혼자서 들판을 가로질러 사라지는 남자의 실루엣은 우리를 망각 속으로 데려간다. 이제는 죽고 없는 재숙을, 그녀들을 잊기 위한 망각 속으로.      

이제는 납처럼 무겁게 가라앉는 시간―
만일 여기서 살아남은 자가 있다면,
얼어붙은 사람들이 눈의 땅을 회상할 때―
먼저―한기를―그다음엔 마비를―그다음엔 망각을 기억하리라―

- 에밀리 디킨슨, 「커다란 고통이 간 후에는 감각이 굳어져 온다네」* 


그리하여 이 오래된 필름은 오늘의 우리에 의해 영사되어야 한다. 이제는 죽고 없는 재숙과 그녀들이 빛 위에 다시 드러날 때 우리의 기억은 재생된다. 빛은 환영이 아니라 실재가 된다. 이제는 ‘없는’ 그녀들이 이제는 ‘있는’ 그녀들이 된다. 그녀들의 죽음이 의미 없음의 나락으로 추락하지 않도록 그녀들에 대한 이야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 말들의 흐름이 미래에 가닿도록 우리는 오래도록 ‘어떤’ 죽음이 아닌 ‘그’ 죽음을 응시한다. 



* 에밀리 디킨슨 지음, 윤명옥 옮김,『디킨슨 시선』, 지만지,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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