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찬바람이 솔솔 불어오던 늦가을,
차가워진 공기만큼 세상도, 나의 마음도 조금은 가벼워진 것 같다.
“여기에 설치하면 되나요~?”
“아니, 거기 말고 더 안으로!”
“이봐, 김 씨! 안으로 좀만 더 들어가서 설치하자고.”
“하나, 둘, 셋!”
오늘은 일요일이라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다.
집에서 눈을 뜨자마자 EBS 방송국에서 틀어주는 만화를 보기위해 졸린 눈을 비비켜 TV를 켰다.
정확히 8시에 시작해서 만화 두세 개를 틀어주었는데, 나에게는 삶의 목표이자 유일하게 스스로 지키는 계획이었다. (평일 오후 다섯 시 반에 틀어주는 만화도 매일같이 챙겨보았다.)
오늘도 어김없이 누가 깨우지 않아도 7시 50분쯤 일어나 조용히 TV 앞으로 가며 누나를 깨웠다.
“누나~ TV 봐야 돼.”
어릴 땐 ‘누나’라고 친근하고 귀엽게 불렀던 것 같은데... 점점 커가며 상황이 달라졌던 것 같다.
누나도 나와 같이 일요일 만화만은 꼭 같이 챙겨봐서, 항상 나보고 깨워달라고 일러두었다.
그렇게 누나와 TV 앞에 앉아 채널을 돌리고 있을 때, 밖에서 여러 사람 소리가 났다.
어제 어머니가 해주신 말씀이 생각났다.
“내일 우리 집에 보일러를 설치할 거야~”
“보일러요!? 그게 뭐예요?”
“이제 연탄 안 쓰고 집에 기름으로 보일러를 때서 겨울에 따뜻하게 보낼 수 있지~?”
언제나 밝고 사랑스럽게 말씀해 주시는 어머니가
유난히 밝은 목소리로 말씀하시는 걸 보니, 뭔진 모르겠지만 좋은 것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뭔지 궁금해서, 나와 누나는 한걸음에 집 밖으로 나갔다.
우리 집은 50년 전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결혼하실 때 지금 있던 집에 나무와 흙으로 직접 집을 지으셨다고 했다. 처음엔 방 2개와 거실 1개가 전부였는데, 큰아빠, 우리 아빠 그리고 고모들을 낳으시며 점점 집을 크게 수리했다고 했다. 고모들은 이제 결혼하고 나가서 없고, 큰아버지도 셋째 고모와 같이 따로 살아서 우리 집엔 방이랑 창고가 많았다.
그중 가장 바깥에 있는 작은 창고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고, 거기서 보일러를 설치하는 것 같았다.
설치하는 게 마음에 안 드셨던 할머니는 공사를 하러 온 인부들에게 호통을 치고 계셨다.
안에서는 어머니가 인부들에게 줄 간식거리를 만들고 계셨고, 아침 일찍 일어난 우리를 보고 대견하셨는지 우리에게도 먼저 고깃덩어리를 몇 개 주셨다.
우리 동네는 우리 집을 포함해서 대부분 기름보일러로 바꾸는 분위기였다.
어릴 때 늘 창고에 쌓아두던 연탄을 이제는 더 이상 볼 수 없는 세상이 왔고, 다 타버린 연탄을 밟을 때 두두두둑 으스러지는 느낌과 소리가 좋았던 나는 내심 아쉬웠다.
하지만 우리 집 아랫집, 신문 사절을 붙여놓은 아저씨네와 우리 집 사이에 방 한 칸짜리 아주 조그마한 집이 하나 있었는데, 그 집만은 계속 연탄을 사용했었다.
학교 가는 날이면 언제나 아침에 일어나 다 쓴 연탄을 꺼내 집 앞에 쌓아두시던 아저씨가 나와 누나를 보며 밝게 웃어주시곤 하셨다.
홍 씨 아저씨였다.
우리 집에서 내려가는 골목은 좁고 햇빛이 들지 않아 늘 축축하고 미끄러웠는데, 홍 씨 아저씨가 언제나 연탄재를 앞에다가 던져서 밟아 놓으셨다.
그리고 나는 대충 밟아 부서져 있는 연탄을 찾아서 아주 잘게 잘게 부수는 일을 했다.
홍 씨 아저씨는 항상 새빨간 홍당무처럼 얼굴이 붉었는데, ‘그래서 홍 씨 아저씨인가~?’ 하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아저씨는 매일같이 술을 입에 달고 사셨고, 술이 몸에 맞지 않는 아저씨는 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으셨다.
“아저씨, 오토바이 한 번 태워주시면 안 돼요~?”
“오토바이~? 그래, 오늘은 누가 먼저 타볼래?”
“저요!!!”
동네 아이들이 일찌감치 학교를 마치고 홍 씨 아저씨 집 앞에 몰려들었다.
“그래, 오늘은 요 작은놈부터 한 번 타자~~”
“우와!!!!!!”
아이들이랑 놀기 좋아하시는 홍 씨 아저씨는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으리으리한 오토바이를 가지고 계셨는데, 집 앞에 오토바이를 세워둘 곳이 없어서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큰 길목에 오토바이를 세워두시곤 했다.
덕분에 동네 사람들은 모두 그 오토바이가 누구 것인지 알았고, 아이들은 그 으리으리한 오토바이를 한 번이라도 타고 싶어서 학교가 끝나면 항상 홍 씨 아저씨 집으로 뛰어갔다.
오토바이 시승은 하루에 한 명, 많으면 두 명밖에 못했다.
위험하다는 이유였고, 무엇보다 동네 어르신들이 좋아하지 않았다.
위험한 것은 절대 아이들에게 가르치지 말라는 뜻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오토바이 시승을 하고 오면, 아저씨는 아직까지 집 앞에 모여 있던 아이들이 아쉬운 표정을 하고 이내 자리를 못 떠나고 있는 것을 보고는 마음이 쓰이셨는지 집에 들어가 무언가를 가지고 나오셨다.
“요놈들! 오늘은 이거나 하고 놀자!”
“우와~! 그게 뭐예요!?”
“너희들, 땅따먹기라고 알지!? 저번에 가르쳐줬잖아.”
“네!! 알아요!!”
“둘둘둘, 팀을 나눠서 하면 되겠다.”
아저씨는 집안에서 하얀색 락카를 꺼내오셨고, 우리는 데덴찌로 팀을 나눠서 어떻게 게임을 할지 정했다.
홍 씨 아저씨는 늘 게임을 가르쳐주고 준비는 해주셔도 게임을 같이 하지는 않으셨다.
우리가 노는 게 좋으셨나 보다.
그렇게 우리가 마을 한가운데서 신나게 놀고 있으면 우리보다 나이가 많은 형 누나들도 하나둘 동네 중심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우리 누나를 포함해서 동네 밖으로 공부하러 나갔던 고학년 누나들, 학원에서 끝나고 집에 오던 교회 밑에 살고 있는 이쁜 자매 누나들, 우리 누나 친구인데 늘 무섭게 나를 바라보았던 정식이 형까지 열댓 명이 넘는 아이들이 매일같이 뒷구지 슈퍼 앞 큰길에서 해가지는지도 모르게 놀았다.
"아들!!! 밥 먹어야지!! 어서 들어와!!!!"
항상 가장 먼저 이 평화를 꺠는건 깐깐했던 정식이 형네 아줌마였다.
변함없이 가장 먼저 저~ 멀리서 다가오며 정식이 형과 동생 보라를 데려갔다.
20명 남짓한 사람 중에 두 명 정도 빠진다고 게임을 못하진 않았다.
우린 다음에 또 보자며 가볍게 인사를 하고 게임에 집중했다.
"아들~~ "
"솔지야~~"
"희선아~~"
하나 둘 점점 어머니들이 해가 졌다며 어서 들어오라고 아이들을 데리러 나오셨다.
항상 랜덤으로 찾아오는 귀가 소리에 아이들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발길을 돌렸고, 내일을 기약하며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이젠 정말 사람이 없어서 게임을 못할 지경이 되고서야 홍 씨 아저씨도 들어가서 식사를 하신다고 하셨다.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 될 것 같다~ 너희들이 어서 집에 가서 밥 먹고 일찍 자거라~"
"네~~ 아저씨 내일 또 놀아요!!"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한 아이들이 홍 씨 아저씨를 먼저 보내주었다.
하지만 어떤 애들이 어머니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먼저 들어갈까?
남은 아이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버티려고 작정한 사람인 듯 '깡통차기', '술래잡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등 다양한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우리 집도 항상 중간쯤에 집에 가는데 오늘은 어머니가 밖에 나가셨다가 늦게 오시는 날이라 거의 마지막 순번까지 왔다. 나와 누나는 그런 어머니가 올 때까지 기다리며 놀기로 했다.
그렇게 아이들이 다 집에 가고, 나보다 서너 살 어린 남자아이 둘이 남았다.
사실 이 아이들은 언제나 제일 늦게까지 남았다.
나와 누나도 가끔 늦게까지 남았는데 그때마다 항상 이 형제가 있었다.
"너희는 엄마가 부르러 안 와?"
"웅 우리 엄마는 일나 가셨고, 아빠는 없어"
아빠가 없다는 말을 처음 들은 나는 잠시 충격에 빠져 어떻게 반응해야 될지 몰라 얼어있었다.
"그래? 엄마는 언제 오시는데~?"
가만히 있던 나를 대신해 누나가 말을 이어갔다.
"저녁 늦게... 11시? 12시?"
상상도 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보통 우리 가족은 10시 쯤 불을끄고 침대에 들어가 잤고, 가끔 10시에 하는 드라마를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와 TV앞에 모여 다 같이 보고 11시에 잤기 때문이다.
"아이고.. 늦게 오시네... 그래도 오늘은 늦었으니까 어서 집에 가자. 내가 집까지 데려다줄게~ "
어린 두 형제가 안쓰러웠던 누나가 두 형제를 집에 데려다 주기로 했고, 나도 누나와 같이 형제 집 앞까지 갔다. 집 앞에 가보니 나보다 한 살 많은 진기형이 살고 있던 집이었고, 그 집에 월세로 살고 있던 가족인 것 같았다.
"잘 들어가고~ 밤에 위험하니까 늦게 다시 나오지 말고~ 알겠지?"
"네~~ 안녕히 가세요!"
아이들과 인사를 하고 나도 누나와 터벅터벅 집에 들어왔다.
'아빠가 없다.. 는 게 어떤 걸까?'
나는 아직 그 말을 듣고 받았던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한채 투벅투벅 앞서가는 누나의 발꿈치만 바라보며 걸으며 집으로 갔다.
하지만 집에 들어가니 엄마가 언제 오셨는지 저녁을 준비 중이셨고, 아빠도 퇴근하고 집에 와계셨다.
"아빠!!' '엄마!!"
나와 누나는 반가운 마음에 신발도 제대로 벗지 않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내일 또 홍 씨 아저씨 하고 놀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