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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성이 Apr 24. 2023

캠핑장에서 만난 은인

캠핑을 하다보면 가끔 고마운 분을 만나게 됩니다. 촛초초로촟초보 시절 야심차게 타프를 샀지만, 타프를 제대로 올리지 못해 시행착오를 반복하고 있던 저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다 친히 망치를 들고 와 타프 설치와 강의를 해주셨던 아저씨도 계시고, 아이와 둘이 라면을 끓여 먹는데 (저희는 정말 라면을 좋아하는 부자라서 라면만 먹는 것입니다.) 아이와 하루종일 라면만 먹는 것 같다면서 먹을 것을 나눠 주신 분도 계셨습니다. 


이렇게 캠핑을 하다보면 은인같은 분을 만나게 되는데 제가 잊지 못하는 은인 한 분에 대한 글을 남기려 합니다. 


아이와 둘이 2년 전 겨울 캠핑을 갔을 때 일입니다. 영하 20도에 육박하는 날씨 때문에 캠핑을 안 가려 했지만, 추위따위는 신경쓰지 않는 아이 때문에 마지못해 캠핑을 떠났습니다. 막상 출발 전에는 가기 싫었지만, 막상 캠핑장을 향하는 차 안에서 추위에 대한 근심보다 아이처럼 이번 캠핑이 기대되고 즐거운 마음으로 바뀌었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도착한 캠핑장, 텐트 설치와 장비 배치를 마친 뒤 아이와 눈싸움도 하고 주변 산책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시간은 빠르게 저녁이 되었고, 저희가 캠핑장에서 반드시 한 번은 먹는 필수 아이템 삼겹살을 먹는데 아이가 입맛이 없다며 평소보다 많이 먹지 않았습니다. 


신성한 삼겹살을 남긴다는 것은 결코 제 자존심과 삼겹살이 제게 주는 신앙심과도 같은 맛이라는 믿음에 어긋나는 배신 같은 행위를 차마 할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저는 무리해서 남은 삼겹살을 마셨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오랜만에 과식체험을 한 오장육부에서는 지금 당장 화장실로 달려가지 않으면 큰 사건이 발생할 것이라는 신호를 1분 단위로 전두엽에 격렬하게 전송하고 있었습니다. 


"아빠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될까?"


"가지마. 참어. 나 혼자 있으면 무섭단 말이야."


아빠의 뱃속에서는 핵폭탄이 터지기 일보 직전인데, 아들은 혼자 있기 무섭다며 저를 화장실에 보내줄 생각이 없었습니다.


결국 아이를 재우고 조용히 다녀오려 했지만, 신생아 체력과 맞먹는 40대 연약한 사무직의 부실한 괄약근은 그 시간까지 강렬하게 남침하는 그것의 공세를 버텨낼 수 없었습니다. 결국 저는 아들에게 "아빠가 못나서 미안하다!"를 외치며 화장실로 달려 갔습니다.  


어두운 겨울 밤의 캠핑장 화장실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보통 이런 상황이면 무서운 생각도 들법도 하지만 저는 똥쟁이가 되면 어떻게 하지 하는 불안감이 해소되며 오히려 행복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계속해서 저 몸에서는 말레이시아의 수도 "쿠알라룸푸르... 쿠알라룸푸르르르.." 를 외치는 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격렬한 쿠알라룸푸르 여행을 마친 제가 이제 마무리를 하려 휴지걸이에 손을 댔는데, 아뿔싸 그곳에는 있어야 할 것이 있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뒷 처리를 해야 하나 하며 당황했고, 귀신이 나타나 파란 휴지 줄까? 빨간 휴지 줄까? 라고 해주길 바라는 황당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 화장실로 후다닥 달려 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이에게 핸드폰을 개통해 주지 않은 상황이라 아이에게 SOS를 요청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물론 아빠 휴지 좀 갖다줘.. 라고 해도 가져다 줄 아이도 아니지만요 -___-)


그분도 저와 유사한 다급한 상황을 겪었는지, 서둘러 문을 닫고 라마조 호흡법처럼 들리는 후하후하... 격렬한 숨소리를 내며 거사를 준비하는 것 같았습니다. 다급한 상황에 "저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휴지 좀 나눔을.." 할 수 없기에 저는 잠시 기다렸습니다. 


화장실에는 한 남자의 몸에서 세상을 향해 날아가는 평화의 상징 비둘기 떼가 날개짓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비둘기들이 짧지만 긴 여운을 남기는 비행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몸과 마음에 어느정도 평화가 찾아왔을 거라 생각이 되었을 때 지금 이 순간 휴지끈이 짧지 못해 존재하지 않는 저는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습니다.


"선생님, 실례가 안된다면 휴지를 조금만 나눠 주실 수 있을까요?" 


"네? 휴지요?"


라고 말한 그 분은 저처럼 휴지 걸이를 만지다 "어.." 하는 짧은 탄식을 내뱉었습니다. 


"여기도 없는데요."


그분도 저처럼 당황한 목소리였습니다. 저는 벽 하나 사이에 둔 그분에게 휴대폰이 없는 어린 아들과 둘이 캠핑을 와 휴지를 가져다 줄 사람이 없는 제 사정을 설명하자 "그럼 제가 전화해서 가져오라고 할게요." 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께서는 와이프로 예상되는 분에게 휴지 좀 넉넉히 들고와 라는 내용의 통화를 하셨고, 잠시 후 조용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화장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여자 분의 "어디야?" 라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저도 모르게 "여기요!! 살려주세요!!" 라고 외칠 뻔 했습니다. 화장실에는 작은 노크가 '똑똑' 울렸고, 잠시 후 "고마워" 라는 말과 휴지가 교환된 아주 짧은 물물교환의 시간이 끝나고 화장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아래로 보내 드릴게요!"라고 외치는 그 분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 벽 아래쪽으로 제게 휴지와 물티슈 몇 장이 함께 전달 되었습니다. 휴지만 기대했는데, 청결하고 뽀송뽀송하게 저의 엉덩이를 만들어 줄 물티슈까지 저는 이 분의 세심한 배려에 감동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상쾌하고 개운하게 뒷 처리까지 마친 저는 오랜시간 화장실에 앉아 있다 보니 다리가 저려 갓 태어난 송아지처럼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왔습니다. 


이렇게 상쾌함과 훈훈한 인정에 대한 감동의 경험은 제 화장실 인생에서 처음이었습니다. 제가 계속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자 이 분은 제 감사의 표현이 부담이 되셨는지 자기는 괜찮다며 좀 더 볼 일을 볼테니 아이 혼자 있으니 빨리 돌아가시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마도 서로 얼굴을 마주쳤을 때 어색한 그 느낌이 싫으셨을 수도 있을거라 생각됩니다.


지금도 그 겨울 밤 추웠던 화장실의 냉기를 나눔의 정신으로 훈훈하게 만들어 주시고, 물티슈까지 챙겨주는 세심한 배려로 저의 청결까지 신경써주신 포천 모 캠핑장의 대인배 선생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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