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집이라면 이래야지’를 향해 가는 중
양평의 2개의 단독주택에서 보낸 4년은 이제와 생각해 보니 꽤 목가적이었다. 손세정제나 마스크택배를 뜯어보며 주말을 마무리하고, 음식점 운영시간제한, 마스크 의무착용등 으로 많은 것이 갑갑했던 코로나시절, 마당에서 노마스크 인 채로 책을 읽고 차를 마시며 보냈다. 시간을 보낼 공간을 찾으러 떠나지 않고 그저 집에 있는 것만으로도 일상이 꽤 괜찮았다. 자가격리도 딱히 두렵지 않았다.
도시보행자의 감각을 지닌 사람
목가적인 양평생활도 3년이 넘어가니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는 어떤 감각 하나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었다. 도시보행자로서의 감각이었다.
농촌지역에 살면서 알게된건데 각 건물들의 거리가 멀다 보니 이동할 때 걸을 일이 없어 작은 소매점을 가더라도 차량을 이용하곤 하는 것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자동차에 시동을 거는 생활이 길어질수록 도시보행자로서의 감각이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거주하는 공간만 중요하게 여기며 도시보행자로서의 감각이 있는지 모르고 살다가 보행활동이 줄어들자 보행감각의 부족과 집과 자연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또 하나의 감각이 도사리고 있었다는 것을 자각하는 계기가 된 셈이다.
코너상점의 쇼윈도의 디스플레이를 힐끗거리며 블록의 모퉁이를 돌고 친구를 기다리다 어묵집을 발견해 그 앞에서 어묵을 먹으며 주위의 상점들을 두리번거리기도 하고 지하철 역까지 천천히 걸어가 승강장을 향해 교통카드를 찍고 게이트를 스르륵 통과하는 일을 하며 느끼는 감각이 필요했다.
구구절절히 도시를 그리워 하는것 처럼 보이게 글이 써지고 있는데 사실 그리 대단하게 도시와 동떨어진 삶을 산 것은 아니었다. 집은 양평이었지만 출퇴근은 논현동으로 했다. 성수동 출근자 남편이 아침마다 차량으로 군자역에 나를 내려주었고 거기서 내가 다니는 회사가 있는 학동역까지는 지하철로 여섯 정거장이었다.
시간과 에너지를 이동에 꽤 많이 사용하며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던 경기도민의 생활이었다. 남편과 나 우리 둘 다 건축설계를 하고 있었는데 사회에서 제대로 커리어를 쌓으며 관계를 맺으려면 도시에 사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는 사실에 서서히 지쳐가는 중이기도 했다.
나는 논현동으로 남편은 성수동으로 출근하는 일이 목가적인 주말을 위해 평일을 희생하는 느낌도 들고 회사가 끝나면 맹렬하게 탄소를 한껏 배출하며 숲 속으로 도주하는 것 같기도 해서 자주 찝찝했다.
어떻게 보면 도시와 자연을 하루에 다 경험하는 삶이라는 장점도 있었지만 일터 외에 실제 정주하는 곳에서는 어떤 관계도 형성하지 못하고 인간관계를 위해서는 맹렬히 운전해서 도시에 도달해야 하는 삶, 일터와 거주 각각의 경험이 철저히 분리된 일상이기도 했다.
시골에서는 떠나온 사람, 도시에서는 떠나간 사람으로 상황마다 이방인의 신분을 입은 기분이어서 어느 곳에서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했다.
양평에서의 생활이 저물고 서울로 돌아갈 때가 오고 있는 것이었다.
늘어난 짐
양평 생활을 정리하는 것은 단순한 이사가 아니었다. 넓은 내외부 공간을 가지면서 세간이 늘었고 그 짐들을 정리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전원주택처럼 손이 많이 가는 곳이 아닌 손볼곳이 없는 신축의 밀도 있는 공간을 갈망하는 마음이 더 커졌다.
미니멀리스트의 트렌드가 휩쓸고 지나간 뒤 일정 부분 나의 생활양식으로 자리 잡은 것도 한몫했다. 늘어난 살림들이 끔찍해 보이기도 했는데 농사 지을 때 쓰는 모자나 팔토시 같은 물건들부터 호미, 삽부터 시작해서 도시의 삶과 시골의 삶을 위한 물건들이 집안에 혼재하는것이 불편했다. 그 물건들을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힘이 현저하게 떨어져 점점 끔찍해 보였다. 만약에 내가 죽는다면 이 물건들은 누가 다 치워줄까. 이런 물건을 치워주는 사회복지사님도 있는 건가. ‘죽은 자의 집청소’라는 책도 생각이 났다. 옷들을 정리하고 수집한 맥주컵들, 맥락 없이 모인 조리도구, 중복된 물건들, 손님용으로 예비해 둔 세간들을 정리하다 보니 수집하는 습성은 마음한구석 어딘가의 공허한 것의 반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포기할 수 없는 마당
이사를 앞두고 잦은 가족회의를 했다. 도시로 다시 돌아가려고 마음을 정하고 보니 이제는 포기해야할 시골에서 누렸던 것이 꽤 많았다. 풍부한 외부공간에서의 활동, 소음에 대한 자유로움, 저렴한 주택가격 등이었다. 여러 이유 중 가장 포기하기 어려운 활동은 마당에서 하는 요리다. 즐거움에다가 합당한(?) 느낌까지 드는 그 행위를 버릴 수가 없었다. 대부분들의 도시생활자는 캠핑이나 펜션에 가서 바비큐를 할 때나 테라스에서 요리하는 경험을 하는데 일상 중에 그냥 고등어를 굽거나 찌개를 끓일 때도 테라스에서 요리를 하는 것이 합리적이고 즐거운 일이었다. 집안에 음식냄새와 이산화 탄소를 걱정해 자연환기를 하고 향초를 켜느라 호들갑 떨지 않는 생활을 체득해 버렸다. 마침 월든에 이런 내용도 있었다.
마침내 현대인들은 야외에서 생활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조차 알 수 없게 되었고, 이제 우리 인간의 삶은 생각보다 더 많은 부분을 좁은 울타리 속에서 영위하기에 이르렀다. 화덕에서 밭까지의 거리도 한층 멀어졌다... 굴뚝이 제대로 준비되기 전까지만 해도, 아침 일찍 집 밖의 공터에 나가서 아침 준비를 했는데 생각해 보니 야외에서 취사하던 것이 더욱 편리하고 즐거운 방법이었던 것 같다. 빵이 구워지기 전에 비바람이 불 때면 판자를 세워 불길을 살리고, 불 주변에 앉아서 노릇노릇하게 빵이 구워지는 광경을 보며 몇 시간이고 즐거운 한때를 보냈기 때문이다. 월든-헨리데이비드소로
그 외에도 시골에서 보내주신 통마늘을 소분하는 일이라던지, 흙먼지가 날리는 묵은 화분의 분갈이, 잠옷바람으로 햇살을 흡수하며 매거진을 읽는 일 등… 마당의 존재이유는 허파의 존재이유 같은 것이 되었다. 도시에 다시 가더라도 테라스가 있는 집을 사는 것을 기본 룰로 삼았다.
이사와 짐
정리해 보면 서울의 신축이어야 했고 외부공간이 필요했고 입주 날짜가 맞아야 했고 지하철 역과 가까워야 했다. 외부공간이 있는 집을 찾는것이 가장 난제였다. 마당은 엄두도 못내고 테라스를 키워드로 두어 달 인터넷 서칭으로 충혈된 눈과 퇴근 후 부동산 돌아보기가 일상으로 자리 잡을 때쯤 여러 조건이 맞는 집을 인터넷에서 찾았다. 규모가 조금 아쉬웠고 주차장 진입에 난이도가 있었지만 서울에 사는데 이 정도가 어디냐며… 공인중개사입에서 나올법한 이야기를 스스로 하면서 계약했다. 이사도 했다. 양평부부가 우리의 아이덴티티로 자리 잡을 때쯤의 급작스러운 이동이었다. 위치는 서울의 동쪽 끝인 암사동이었다. 새로운 집은 신축 빌라, 정확한 건축법상 용도는 도시형 생활주택(단지형)이었고 새하얀 타일과 새하얀 벽과 적당한 폭의 테라스가 있었다. 다만 테라스 밖으로 보이는 것이 산이 아닌 어느 초등학교인 것이 아쉬웠지만, 양평에 살 때처럼 장작불을 떼지 못한다는 사실에 잠시 원래 집에서 장작을 못피우나? 버퍼링이 걸리기도 했지만, 어쨌든 여러 필요에 의해 암사동테라스 집에 안착했다.
새하얀 집이 거의 병원 안에 있는 것처럼 느껴져 얼떨떨한 기분으로 뒤척이던 밤 여행부심이 담긴 기념마그넷 몇 개를 새집의 냉장고에 붙이니 이제야 우리 집 같았다. 미니멀에 한동안 심취해 있었지만 내가 가지고 다녔던 '짐'에 깃든 분위기가 중요하게 작용할 때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짐의 가치를 떨어뜨리기 위해 겁주는 여러 말들이 떠올랐다. 대부분 원수 같거나 내키지 않지만 도움을 주거나 인내해야 되는 사람을 가리켜 짐짝이라고 해오는 것 처럼.
짐은 나를 구성하는 역사일 수도 있다. 나와 함께 살아온 물건들을 무조건 '짐짝' 취급하면 안되겠 구나.
집이라는 곳은 일상적인 물건들이 가득한 곳입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사용함으로써 그 존재를 인식합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예술작품만큼의 관심을 기울이진 않죠. 그것들은 우리 자신의 일부이기도 하며 너무 가까이 있어 주의를 끌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것들을 한번 심사숙고해서 살펴보세요. 그러면 무슨 일이 생길까요?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사르트르 소설 속의 인물이라면 〈구토〉를, 미국 작가 라이트 모리스라면 〈거룩함〉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것입니다. 공간과 장소 - 이푸투안
테라스의 오류
암사동테라스는 우리가 이 집을 선택한 가장 큰 요소였는데 생각보다 대단히 유용하지는 않았다. 현관문과 연계된 테라스, 한때 일본에서 유행했던 아파트의 마당형 발코니처럼 생겼어야 했다. 마당처럼 매일 지나쳐야 그 공간을 연속적으로 인지하고 활용하게 되는데 평면상 내방과 세탁실과 연계된 테라스는 뭔가 큰맘 먹어야 나가게 되는 공간이 되었다. 게다가 널찍한 테라스에서 라면도 끓여 먹고 광합성도 하고 그럴 줄 알았는데 주변의 우리 집보다 높은 아파트나 다른 건물들에서 내려다볼 수도 있는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여성인 나보다는 노출에서 자유로운 남편은 개의치 않고 테라스에서 커피로스팅도 하고 취미생활을 즐겼다. 나는 현관문과 연결되어 집을 나서거나 들어설 때 자연스럽게 밟게 되는 테라스가 아니라면 활용도가 떨어진다는 사실만 알게 되었다.
게다가 오롯이 외기를 느낄 완연한 봄, 가을이라 할만한 날은 일 년 중 며칠 되지 않는데 그 시간마저도 다 회사에서 보내기 때문에 테라스에서 보낼 시간이 현저히 적게 느껴졌다. 하지만 테라스를 허파처럼 생각하고 텐트를 말리거나 야외에서 고기를 구울 수 있는 공간이 무조건 있어야 한다는 신념이 나보다 더 두터운 동거인을 볼때마다 이런 연고지도 없는 동네에 왜 살고 있지..? 싶다가 아. 테라스 때문이었다를 자각한하고는 한다.
그래도 4년 만에 돌아온 서울에서 느끼는 도시의 감각이 즐거웠다. 올리브영으로 걸어가는 길,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는 것, 한강에서 산책하는 일로 기분이 좋은 순간들이 종종 있었다.
자기만의 방, 여백
이 얼마나 당연하면서도 한이 맺히면서도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하는 단어인지.
주택공간을 개인공간, 작업공간, 공용공간으로 구분했다. 공간의 성격구분까지는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의 주택이든 같다. - 나무, 돌, 그리고 한국 건축 문명, 전봉희
위에서 인용한 주택 분류방식에 따라 우리 부부가 살았던 공간을 생각해 봤다. 개인공간으로는 개인의 서재나 업무공간등이 있었고 가족모두라 해봤자 두 명이니 함께 사용하는 의미라는 점에서 공용공간은 거실과 침실, 그리고 공용이자 작업공간인 주방이 있었다. 그 중 개인공간에 대해서 생각해 봤는데 결혼하고 아차산과 양평까지 세 개의 집을 거쳐오면서 주로 나는 거실과 안방 주방을 사용했고 남편은 개인 작업방을 가지고 있었다. 거실테이블이나 주방의 식탁에 노트북을 펴고 작업하는 방식을 선호하는 나, 물건을 만들고 장비를 쌓아두는 남편의 특성이 각각 반영된 것이었다.
그랬기에 방이 4개 딸린 집에 살면서도 내 방이라는 것을 가질 생각을 딱히 하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암사동에 이사 와서 자격증 시험과 잦은 줌미팅, 혼자 글을 쓰는 일, 이직 준비등으로 밀폐된 공간이 필요해지면서 개방된 공간에 두었던 책상을 나만의 방으로 가져왔다. 결혼하고 거의 10년 만에 내방이 생기 되고, 우리는 각각의 방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
남편과 나의 방이 각각 생겼다.
이 집에 오기전 나는 거실에서도 항상 작업을 하고 글을 써왔고 퇴근한 뒤 집에서 얼마 생활하지도 않는데 방이 무슨 필요야 라고 생각해왔었는데 방이 생기고 나니 내 방이 없을 때 어떻게 살았나 싶을 정도로 나만의 방에 계속 머물렀다. 나는 몰입을 좋아하고 또 몰입하는 나 자신이 좋다. 글을 쓰는 이유도 몰입해서 나온 결과물, 몰입하기 전에는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물을 만나는 기분이 들어서다. 그것을 해낼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을 나이 40이 다 되어서야 만나게 되었다. 생산성도 올라가는 느낌이라 거의 방에 콕박혀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남편역시 본인의 방에서 여러 작업을 한다.
집에 맞춰 생활이 바뀌는 것이 흥미로운 일이다. 각자의 문달린 방을 가지게 되니 함께 협동해서 해야 하는 집안일을 마치고 시간이 나면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각자의 즐거움에 빠졌다. 각자의 방에서 문득 의미 없이 서로 이름을 고함치듯 부르고 상대방이 왜 불러? 하면 대답 안 하는 식으로 서로의 생사(?)만 확인하곤 한다. 재미있는 이야기나 아이디어는 카톡으로 보낸다. 내가 하던 일이 무료해지면 남편의 작업실로 가서 남편의 모니터에 띄워진 쇼핑목록이나 프리미어 프로로 영상편집 하는 것을 구경하다가 내방으로 돌아온다.
각자의 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각자 몰입을 한다고 하면 주변에서는 역시 부부란 떨어져 있어야 행복하지.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부부는 아직까지는 꽤 사이가 좋은 편이라 그저 나만 아는 웃음을 짓곤 한다. 내가 카톡으로 ‘치킨’ 하고 단어만 남기면 남편은 치킨배달을 시키고 우리는 거실에서 만나서 즐겁게 치킨을 먹고 다시 각자의 방으로 헤어진다.
어떤 날은 거실에 함께 있다가 내가 ‘나 먼저 방에 들어가도 돼?' 하고 묻는다. 말투는 허락을 구하는 것이지만 사실 허락을 하고 안 하고는 없다. ‘뭘 그런 걸 물어.’라는 말대신 ‘그래 그럼 나도’라고 말하면서 다시 고립을 반가워하는 남편을 발견한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누군가 방에 들어갔을 때 혼자 거실을 차지하는 즐거움도 있다. 방에 들어가면 누군가 나를 기다리지 않는 편안함으로 몰입을 하는 즐거움과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남편이 있는 것도 좋다.
공간이야기를 하면서 갑자기 남편과의 알콩달콩한 사생활을 너무 늘어놓는 느낌이라 여기까지만 써야겠다.
자기만의 방이라는 글감으로 공간의 분리를 이야기하기 보다는 여백을 이야기 하고싶다.
살면서 함께 있는 사람에 의해 그 공간은 천국이 되기도 하고 지옥이 되기도 한다. 나는 지옥을 만드는 사람은 아니겠지라는 생각을 대부분 할텐데 누구나 그런사람이 될 수 있다. 나도 누군가에게 함께 있는 것 만으로 지옥을 선사할 수 있다는 것을 항상 자각하려고 한다. (후배팀원들과 점심시간이나 술자리에서 다른 식당이나 먼 테이블에 앉기도 하는데 하루 중 지옥의 시간을 벗어나라는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자각을 유지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나와 함께 사는 사람 사이에 여백을 두면 조금 살기 좋아진다고 생각한다. 큰 싸움 없이(아직까지) 남편과 잘 지내는 이유는 그런 여백들을 존중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좋은 집
좋은 집에 살면 성공할 확률이 높아져 웬만한 일은 집에 오면 다 극복이 되거든. - tvn 드라마 작은아씨들 오혜석(김미숙) 대사 중
이런 대사가 있었다. 집에 와서 내 방에 콕 박혀 글을 쓰거나 책을 읽거나 그냥 침잠하는 느낌으로 몇 시간 보내면서 이런 시간과 공간을 누리기 위해 밖에 나가서 그런 고생들을 겪은 거라면 견딜 수 있겠다 생각한 적이 있다. 하루종일 허우적거리거나 헛손질하는 느낌으로 회사일을 마치고 집에 도착해 오롯한 내 시간을 30분이라도 가질 수 있다면 다음날이 좀 괜찮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야근을 하지 않는 패턴이 꽤 길어지며 어느 날 아직도 날이 환한 여름의 저녁 집에 와서 나의 방에 들어가 있을 때 느껴지는 안온한 기분도 꾹꾹 눌러 적어두고 싶다.
결론이 필요한 글은 아니지만 암사동집에 살면서 알게 된 것들을 (나중에 내 집을 설계할 때 적용하기 위해) 좀 결론처럼 정리해 둔다.
- 테라스처럼 집에서 가장 좋은 공간, 활용이 필요한 공간은 어느 지점에서든 잘 보이고 접근가능한 곳에 위치해야 한다.
- 어디에 살아도 나만의 방이 있으면 살 수 있겠다.
- 나는 단출해진 세간과, 헐렁한 옷장, 아무것도 올려지지 않은 테이블을 볼 때 집이라면 이래야지,라고 자주 생각하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