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군 시골집, 남편이 나고 자란 집
나고 자란 집
약 13년전 결혼하기 몇 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새로 산 이불, 손거울 중 만듦새가 꽤 괜찮은 것들을 골라서 예쁘게 포장하여 예비 남편의 어머니가 사는 곳, 앞으로 시댁이라고 불릴 장소, 남편이 태어난 집을 방문했다. 의성군 어느 마을에 있는 구옥이었다.
이 집은 남편이 나고 자란 집이고 명절이 되면 스무 명 가까이 모이는 집, 이 집에 살았던 사람과 그들의 가족 또는 그들의 친구들도 찾아오는 집, 마을사람들이 '미동댁네'라고 부르는 집이다.
도시에서 재개발, 재건축, 청약, 전세, 월세로 이삿짐을 꾸리며 떠밀려 다니며 언제부턴가 집은 삶을 사는 곳이라기보다 재화가치로 사고파는 것의 의미가 더 강렬한 요즘 '나고 자란 집'이라니... 지금 쓰면서도 마음이 웅장해지는데 이 집에 처음 방문 했을 때 말 그대로 남편이 나고 자란 역사(?)를 들으며 이곳은 임 씨 가족들의 모태공간, 구심점, 태어난 곳이자 돌아갈 곳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집의 구조
내가 처음 이 집에 방문한 날 남편은 약간 설레었던 것 같고 나는 조금 긴장했던 것 같다. 나는 생소한 집의 형태를 둘러보느라 두리번 대며 마당으로 들어섰다. 대문이나 담장은 따로 없고 외부도로와 집 내부 마당의 경계는 뚜렷하게 나뉘어 있지 않았으나 마당 진입부부터는 약간의 경사가 시작되어 마당으로 차량이 진입할 수 있었고 마당은 도로와 면해 있는 아랫마당과 집의 본채와 맞닿아 있는 윗마당으로 나뉘어 있었다. 윗마당과 아랫마당의 레벨은 어린이의 키 정도의 높이 차이가 나는데 철근 없이 시멘트를 부어서 만든듯한 모양이 제멋대로인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 계단을 목재데크로 바꾸고 주변에 조경을 심는 평소 습관적으로 하던 보수공사 장면을 상상하며 한 칸에 한 걸음씩 넓은 보폭으로 계단을 올랐다.
윗마당으로 올라와 보니 본채의 구조는 한옥의 공식을 가지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집도 이런 한옥을 기본으로 한 구조여서 익숙했다. 3칸으로 이뤄진 홑집구조라 부엌-안방-건넌방이 있었고 안방 앞에 통로가 있었다. 홑집은 4칸을 기본구성으로 할 때 부엌-안방-마루-건넌방 구조를 갖추는 것이 가능하지만 미동댁네는 3칸이었기 대문에 시어머니가 주무시는 안방이 거실이자 침실의 기능을 맡게되었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4~5명, 때로는 그 이상의 인원이 안방에서 함께 텔레비전을 보고 밥상을 들여놓고 밥을 먹기도 했다. 안방이 있는 칸에는 건넌방과 부엌을 연결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통로가 생겼다. 이 통로때문인지 안방안에 있으면 아늑하면서도 좀 어두운 느낌이 든다
윗 마당에는 본채가 있고 아래 마당에는 별채가 있다. 별채는 아직도 아궁이 불을 떼서 바닥을 데우는 시스템을 갖췄다. 이 집에 처음 방문한 날 아궁이에 장작을 넣으면서 방을 데우는 경험을 허락 받은 나는 시뻘건 불꽃의 소실점을 노려보면서 홀린 사람처럼 아궁이에 마구마구 장작을 집어넣었고 별채 바닥의 장판을 태웠다. (나 말고도 도시에서 미동댁에 장가든 둘째 시매부 이상*씨도 나와 똑같은 행동을 했다고 했다.) 그리고 별채옆에 화장실과 욕실만 있는 또 다른 별채가 있었다. 이 별채는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2010년에 시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한 창고 자리에 의성군 시공업자에게 의뢰해 샌드위치 패널로 지었다.
딛고 올라서는 생활양식
본채를 살펴보면 기름보일러 난방이라 집을 바닥에서 높이 들어 올릴 필요는 없는데 기단부가 있고, 댓돌이 있고 그 곳에서 신발을 벗고 마루로 들어서는 구조였다. 이 집은 온돌방을 원형으로 하고 있기에 보일러로 설비가 바뀌었는데도 온돌방의 설비가 갖춰야 할 높낮이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전원주택에 살아보며 느낀 것이지만 바닥에서 올라오는 습기와 벌레로부터 집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집은 바닥면에서 어느 정도 올라와 있을 필요도 있다. 아궁이와 온돌시스템이 없어져 기단부와 집의 바닥이 떨어져 생긴 공간에는 문을 달아 막아놨는데 시골을 떠돌며 번식하는 고양이들이 사는 자리가 되었다. 새로 짓는 농가주택들을 살펴보면 마당과 방의 단차이가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 않고 거주하시는 분들이 무릎이 아프실 텐데도 구들이 깔리는 것처럼 방바닥을 높게 만들어 뜰마루나 봉당을 한번 딛고 올라가는 구조로 집을 만든다. 습기를 고려한 것일 수도 있지만 마당에서 방으로 올라갈 때 뭔가를 한번 딛고 올라가는 것이 이제 꼭 온돌구조가 아니더라도 생활양식으로 남은 것 같다.
흙심벽+몰탈 10T?
미동댁네를 지을때 전통한옥 방식으로 집을 지었다면 흙심벽으로 벽을 엮었을 것이다. 진흙으로만 메꾸면 부서지고 허물어지기 때문에 심지를 만든 다음 흙벽을 바르는 방식이다. 몇 해전 시골집을 직접 보수한 일이 있다. 보수라고 하기엔 거창하고 벽에 페인트칠을 다시 하는 작업 정도였다. 아랫방의 벽을 만지작 대다가 외벽에 약 1센티정도 안 되는 두께로 붙어있던 몰탈이 깨지면서 그 안에 흙으로 된 벽의 모습이 드러났다. 한옥에서는 흙벽 위에 회칠을 하는데 회칠 대신 수성페인트 흰색을 칠하기 위해 흙벽 위에 얇게 바른 몰탈이 나의 섬세하지 못한 손놀림에 깨져 나간 것 같다. 심지를 확인하겠다고 흙을 파면 벽에 구멍이 뚫릴까 봐 시도해보지는 못했는데 언젠가 이 집을 철거하는 일이 생기면 이 벽속의 얼개를 어떻게 짰는지 확인해 보고 싶다.
마당
이 집의 가장 매력적인 장소는 마당이다. 시골집을 벗어나 각자의 아파트의 살고 있는 미동댁네의 자녀들은 이 마당을 느슨한 모임 장소로 삼는다. 오는 시간도 맞추지 않고 모임의 성격도 특정하지도 않는다. 임 씨 자손들의 배우자와 그들의 자녀들이 작정하고 모이면 스무 명에 가까운데 남편이나 시매부들이 마당에서 고기를 굽고 남편의 누님들 나에게 형님들 세분이 일사불란하게 상을 차리고, 차린 상을 마당 어디에 세팅할지 터(?)를 잡고 다 같이 왔다 갔다 차리고 먹고 놀고 흩어진다. 이 많은 사람들이 식사의 시작은 같은 시간에 하지만 끝나서 흩어지는 시간은 자유다. 오래 앉아서 술을 한두 잔 기울이면서 옛날이야기를 안주삼아 대화하는 사람도 있고 방에 들어가 텔레비전을 보는 사람도 있고 조카들은 삼삼오오 부엌에 모여 각자의 집에서는 금지된 불닭볶음면에 치즈투하해서 먹는 상을 차려내기도 한다. 경계가 불분명한 마당의 공간이 주는 자유인지 집안의 문화가 주는 자유인지 모르겠지만 모이고 흩어지고 숨고 머무르는 자유롭고 평안한 공간이다.
경계
가장 놀라운 점은 미동댁은 대문도 없고 담장도 없다는 것이다. 도로와 마당은 약간 다른 바닥 포장으로 구분되고 옆집과의 경계는 레벨로 구분되어 있다. 마당에서 싸우기라도 하면 동네방네 소문이 날 것이다. (어쩌다가 나도 시댁에 놀러 갔을 때 옆집에서 싸우는 소리를 듣게 된 적도 있다.) 게다가 시댁의 전면도로 건너편에는 경로당이 있는데 경로당에서 시댁 마당이 한눈에 보인다. 경로당 앞 따뜻한 볕을 따라 어르신들이 줄지어 앉아있곤 하는데 누군가 미동댁네 차 들어온다! 하면 어머니는 경로당에서 집으로 돌아오신다. 도대체 미동댁의 경계는 어디쯤일까? 경계가 안전하다고 여기지는 테두리라면 어쩌면 이 마을 전체가 심리적인 미동댁의 이마을 사람들을 포함한 경계인 것 같다. 온 마을에서 집안에 누가, 무엇이 있는 줄 알고 있고 도시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익명성 따위는 없다는 것이 어쩌면 문제일 수도 있다. 감추려고 해봤자 하루하루 집안마다의 대소사가 경로당이라는 마을의 거실공간에서 공유된다.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모두 다 공유되는 이 마을은 신작로에서 마을로 꺾어져 들어오는 길에 '범죄 없는 마을'이라는 큰 비석이 하나 서있는데 아마 거기서부터가 심리적인 대문이라고 여겨진다.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 집에 누가 살고 누가 오늘 손님으로 왔다 갔으며 누가 현재 병원에 입원 중이고 자식 중에 해외에 나가사는 자식이 있는지 누가 결혼을 하고도 아직 자녀를 안 낳았는지 이런 것들을 다 파악하고 있다. 자녀들이 없을 때 이 마을에 사는 어르신들은 모두 경로당에서 함께 밥을 해 먹고 어르신들의 자녀들이 때에 맞게 밀가루, 쌀, 고기, 커피믹스등을 떨어지지 않게 경로당으로 사서 나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