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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지원 Nov 15. 2023

나의 살던 공간은

내가 살던 곳 썰좀 풀어볼까.

집이라는 곳은 일상적인 물건들이 가득한 곳입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사용함으로써 그 존재를 인식합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예술작품만큼의 관심을 기울이진 않죠. 그것들은 우리 자신의 일부이기도 하며 너무 가까이 있어 주의를 끌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것들을 한번 심사숙고해서 살펴보세요. 그러면 무슨 일이 생길까요?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사르트르 소설 속의 인물이라면〈구토〉를, 미국 작가 라이트 모리스라면 〈거룩함〉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것입니다. <공간과 장소 - 이푸투안>


뒷북이었다. 코로나가 극심했던 3년 동안 왜 나는 걸리지 않는 거냐며 너스레를 떨었는데 일상으로 다시 돌아오고 코로나 의무격리가 없어지던 거의 끝물에 갑자기 확진판정을 받았다.

그것도 설 명절에 격리가 시작되어 별수 없이 일주일 동안 침대와 책상만 오갔다.

덕분에 연속된 시간 동안 집이라는 곳을 뜯어보고 곱씹게 되었다. 아주 오랜만, 거의 처음인 것 같았다.

집을 곱씹다가 최근 대다수가 집주소와 아파트 브랜드만 듣고도 재산의 등급을 매겨버리는 집을 재화의 가치로 여기는 세상이 되어버려 나는 어떤 공간을 좋아하는지 자꾸 덮어두고 살고 있었다는 게 떠올랐다. (소유를 많이 못한 나는 소유를 드높이는 가치와 무관한 사람처럼 행세할 때도 있었지만 어쩌면 덩달아서 집을 재화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받아온 건축교육과 건축설계의 실무경험이 집을 재화가치로만 보는 태도를 경멸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고 인스타에 나열되는 가장행렬과 같은 화려함에 비하면 내가 살았던 집들은 너무도 초라하고 재화로 따지자면 더욱더 초라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고열과 인후통을 탑재하고 천정을 바라보면서 내가 사는 집에 대해 생각하다가 나를 중심으로 둔 내가 살아왔던 집들, 여러 자아 중 집에 있는 나를 기록해 보기로 했다.


하재영 작가의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라는 에세이처럼 누군가 살아온 집에 대해 적은 글을 읽을 때마다 나도 유사한 포맷의 글을 쓰고 싶은 충동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살아온 집 이야기를 하게 되면 삶의 깊숙한 이야기까지 와르르 쏟아놓을 거 같았다. 태양이 이동하며 길고 짧은 그림자를 만들듯이 내가 사는 집이 만들어낸 나의 어두움과 밝음이 고스란히 드러날 거 같은 기분이 들어 주저하기도 했다.

다 튀어나오려는 마음을 조금은 억눌러가면서 기록하려고도 했었다.

그러나 어두움은 한편 정직함을 의미하기도 해서 스스로에게 정직하게 쓴 글은 쓰고 있는 나를, 아니면 읽는 사람을 어떤 형태로든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집은 거주의 기본적인 생활의 기능 외에도, 투자, 과시, 업무, 취미용도 등으로 이용되기도 해 우리는 타인의 집에 초대받게 되면 그 사람의 일정 부분을 지나치게 많이 알게 되는 듯한 친밀감도 느끼는데 내가 살았던 공간을 읽으며 친밀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었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요즘에는 힘든 현실을 딛고 성공한 자수성가형 인간보다 태생적으로 부유하게 태어나 구김 없이 자란 인간이 더 인정받는다고 하는데 나는 오히려 어두운 구석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사람에게 호감보다는 거리감을 느낀다. 그 사람이 나에게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어두움을 숨기고 있을 것 같은 두려움이기도 하다.

어두움이 나와도 괜찮다는 솔직한 글쓰기의 불안감이 떨쳐졌다.


내가 살았던 집은 8개인데 태어나서 결혼하기 전까지 (기억하는 기준) 4번의 이사를 했다. 결혼 후에도 4차례의 이사를 했다. 몇 달에 걸쳐 결혼 후 살아온 4개의 집과 인터넷 공간에 대한 기록을 우선 남겼다.

내가 선택한 업무공간, 남편의 시골집 이야기, 어린 시절 살았던 공간도 나중에 기록해 두고 싶다.

우리 부부는 건축과를 졸업하고 설계를 하고 있고 설계사무소에서 옆자리에서 일하다 결혼을 했으니 우리가 살아온 집은 건축학도로, 실무자로 고르고 가꿔온 생활 기록이기도 하다.


주택설계를 하며 평면을 스케치하다 보면 자꾸 어떤 공간과 닮아가는데 어린 시절 살았던 집의 형태가 불쑥 튀어나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살아왔던 곳은 사람에게 체화되어 원형으로 남게 되기도 한다면 건축가가 아니라도 공간의 경험은 그 사람의 치명적인 한 부분을 결정지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나를 나답게, 어떤 사람을 완전 하게 도울 수도 있다.

'나를 나답게 만드는 공간'이라는 말이 너무 추상적이라면 오래 머물고 싶은 공간이 더 설명하기 쉽다.

오래 있으려면 깨끗해야 하고 따뜻해야 하고 내가 좋아하는 물건이 적당히 있어야 하고 외롭지도 완전히 개방되지도 않아야 한다. 여러 공간들을 선택하면서 우리가 선택한 공간들이 처음 예상한 목적이 적중한 순간들로 채워지는 날도 있었지만 공간의 물리적 조건으로 인해 예상치 못했던 행동과 감상들로 알게 된 것들이다.


퇴근 후 가벼운 식사를 하고 달리기를 하러 나가기 전 책상에 앉아 기억 속의 공간들을 꺼내 놓고 조심스럽게 살았던 집들을 기록했다. 이푸투안의 글이 나를 움직였고, 이상한 집이라는 일본의 오컬트소설의 체험을 따라 했다. (이상한 집에서는 책의 모든 페이지에 평면도가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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