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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지원 Jun 29. 2024

미동댁네 프리퀄

미동댁네가 지금의 모습을 하기까지 (미동댁장남 구술인터뷰)

남편과 지방에 내려가면서 미동댁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다 구술인터뷰가 되었다.

미동댁네가 이렇게 되기까지 가족들의 손으로 여러 번의 리모델링, 증, 개축 공사가 있었다는 걸 듣게 되었는데 그 안에 시대별 산업의 변화, 자연과 건축의 관계, 기능보다는 관념적인 것에서 오는 삶의 만족에 대해 생각했다.


(하기의 명조체 오렌지빛 글씨로 옮긴 내용은 사투리와 비문이 섞여있어 양해... 가 아니라 훨씬 더 잘 읽힌다는 점을 전달합니다.)



학교 갔다 오면 계속 시멘트를 갰지

요즘 시멘트는 몰탈(시멘트+모래)로 파는 제품도 있지만 옛날에는 시멘트만 있었어. 그래서 모래를 퍼오려고 경운기를 낙동강까지 끌고 갔어. 집에서 경운기로 한 시간 정도 되나? 10킬로미터 정도 되는 거리를 갔었는데 어릴 때는 아버지가 시키면 하기 싫어가지고 막 억지로 하고 그런 게 아니라 학교 끝나고 집에 오면 할 일이 없어서 휴대폰도 없었기 때문에 어른들 시키는 거 하는 게 너무 재밌어서 옆에 계속 쫄쫄쫄 따라다니면서 그걸 도와줬다니까. 그게 재미고 놀이였어. 모래를 퍼오면 집에서 체로 걸러서 굵은 건 걸러내고 시멘트랑 배합하는 거 까지 했어. 집에 굵은 모래 거르는 체도 있어서.

아버지가 집을 계속 수리했었는데 무너진 걸 고치는 수리가 아니라 오래된 재료를 나름 현대식 재료로 조금씩 바꾸는 작업 같은 거야 흙집이었기 때문에. 시멘트나 블록으로 바꾸는 거지.


건넌방이 생기기 까지

첫 번째 수리는 지금 건넌방 있잖아. 거기가 절반이 마루였고 절반이 방이었어.

앞쪽이 마루였는데 마루가 진짜 예쁜 마루였어. 그 진한 시골집 갈색 니스칠한 것 같은 마루 있잖아.

마루 뒤로는 골방 같은 게 하나 있었는데 거기에 4명 자면 딱 맞는 사이즈 여서 여기에 누나들이랑 어무이가 잤어. 7, 8월에는 마루에 엄청 큰 모기장을 쳐서 온 가족이 다 같이 잤어. 원래 자는 4명에다가 나랑 남동생까지. 잠뿐만 아니라 그 마루에서 감자도 쪄먹고 낮잠도 자고 공부도 하고 밥도 먹고 여름에는 마루에서 많은 것을 했어. 어무이가 엄청 긴 밀대로 반죽을 밀어서 국수를 만들기도 하고. 아 국수 먹고 싶다.

중학교 1, 2학년 때까지는 그 방에 불을 땠어 나무로, 거기에 아궁이가 있었어. 지금 부엌 쪽에도 아궁이가 있어서 아궁이 두 개가 있었고 지금은 막아버린 거야. 그래서 굴뚝이 있는 거야. 그때 보일러를 처음으로 설치하고 틀었지, 기름보일러라는 거를.

애들이 크기시작하니까 방이 더 커져야 된다고 생각했는지 마루에 벽을 쳐서 실내로 만들었어 브로크(블록)라고 했는데 8인치 블록 있지 큰 거 그걸 사다가 한 장씩 한 장씩 아버지가 직접 쌓는 거야.

그래서 나는 시멘트를 따라다니면서 벽을 발랐는데 지금 생각해도 참 답답한 게 그 단열재도 한 개도 없이 했거든. 그래서 아직도 외풍이 센 거야. 근데 그때는 흙보다 공장생산된 브로크면 또 좋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래서 뒤쪽은 흙벽 위에다가 시멘트를 발랐고 흙벽에다가 이제 비 오면 그냥 쓸리니까 흙벽에다가 시멘트를 얇게 한 10mm  정도 발랐고 탈락도 많이 됐지. 새로 세우는 벽은 브로크로 쌓고 그래서 지금도 반은 흙벽 반은 브로크벽이야

 


일하는 소, 사업용 소, 아낌없이 주는 소 를 위한 우사

그러고 나서 거기 밑에 지금 화장실 샤워실 있는 자리에 계단을 내려와 가지고 그 마당으로 내려가는데 문주가 있었어.  

문주 뭔지 알지 그냥 지붕 엄청 깊은 문주가 있었어. 대문간이라고 인터넷 쳐보면 나올걸. 계단에서 내려갈 때 오른쪽에 한 가로 세로 2m 정도 되는 소 우사가 있었어. 소 딱 한 마리 정도 들어가는 거.

일 시키는 소를 한 마리 키웠는데 그때는 이제 농기구도 제대로 안 돼 있고 하니까 소로 밭을 갈았다고, 쟁기도 있었는데 하루에 한 번 정도는 소를 끌고 나갔어 일하러 한 10 몇 년 키운 것 같아.

소는 이름도 없었고 나 중학교 3학년 때인가 고등학교 1학년 때인가 소를 팔았어. 늙어가지고.

근데 그거를 아버지가 엄청 오랫동안 키웠던 소잖아. 송아지 때부터 키웠데.

소를 팔게 된 이유는 경운기가 생기면서 소가 했던 일을 거의 다 해주니까 소는 이제 의미가 없는 거야. 그리고 늙으니까 힘이 없어서 집에만 있었어. 키워서 그냥 팔아야 하는 존재가 돼버렸어.

그 소가 젊었을 때는 항상 새끼 송아지도 있었고 새끼 빼서(낳아서) 팔고 이랬거든. 나도 그 소에 타고 막 이랬었지. 소가 순해가지고. 가끔씩 그 소를 몰고 나혼자 데리고 나가서 풀 먹이고 들어오고 이랬어. 집 앞에 거기 옛날에 동네 우물이 있었다는데 알지 그쪽에 보면 풀이 많았거든. 근데 이제 경운기가 들어가지 못하는 한두 군데 때문에 소가 있었을 뿐이지.


재미있는 게 소가 옛날에는 같이 일하는 존재였는데 이제는 그냥 새끼 빼서 팔거나 키워서 파는 거 있잖아. 그렇게 농사짓는 도구가 바뀌면서 그걸 다 허물고 지금 마당에 보면은 짚 쌓아놓은 데에 그냥 소 사업을 하려고 크게 우사를 또 지었어. 소 사업을 하기 위해서 그것도 역시 다 브로쿠로.

그거 짓는 것도 내가 동생하고 도와줬지. 네 마리 정도 키울 수 있는 엄청 큰 소우사를 그 마당에다가 한 거야. 그래서 소를 한 마리씩 집어넣어 가지고 최대 네 마리까지 됐어. 그래서 키웠지.


아버지가 소 4마리 키울 때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소가 새끼를 낳다가 자궁 같은 내장까지 새끼랑 같이 밖으로 나왔어. 근데 그게 엄청나게 커서 어떻게 할 줄 몰라서 큰 고무 다라이에 담아놓고 수의사를 불렀는데 이 거를 그냥 다시 집어넣으면 된데. 그래서 어른들이 두 명 수의사 하고 아버지 하고 소가 움직이지 못하게 잡는가 했더니 아버지가 갑자기 나보고 뭘 구경하고 있냐고 니 빨리 들어와 가지고 이거 집어넣으라고 같이 그래가지고 그거(소 자궁)를 잡고 소 안으로 밀어 넣었다니까 맨손으로, 엄청 뜨거웠지. 뜨뜻한 기억이 아직도 있어.


축사 때문에 모기도 진짜 많았는데 오후 저녁 한 5시 정도 되면 뒷밭에 가서 쑥을 캐와. 근데 어린 쑥 말고 좀 자란 쑥을 말려놔. 그래서 어디 보관을 해놓으면 약간 마르거든 거기 불 붙이면 연기가 진짜 미친 듯이 나. 그냥 불이 나는 게 아니라 약간 젖어 있는 상태로 그래서 그런지, 그거를 쑥을 맨날 태웠다고 그 주변에서 그러면은 지붕으로 올라가는 모기가 다 죽어.


아무튼 소 팔아서 대학도 다 보내고 자식들 독립할 때 돈도 보내고 소는 적금 같은 거였지

지금은 소를 함부로 못 키우거든. 하수 처리 때문에 양성화시켜 가지고 근데 옛날 같은 경우에는 막 키웠다고 그래서 소똥이나 이런 것들이 그냥 하수로 다 들어갔어 하천을 따라서 줄줄 내려갔는데 지금생각해보면 말도 안되지.


본의 아니게 공개공지가 된 안마당

그리고 지금 이 건물 있는 위에 캐노피 있는 그 건물 있잖아 그건 없었고 쉽게 말하면 안에 안마당이 생긴 거야. 안마당이 생겨가지고 거기서 그렇게 해놓으니 까는 뭔가 햇살도 좀 따뜻하고 막 그러니까 소똥 냄새는 나지만 동네 어른들이 많이 모일만한 마당이 된 거야

보통 11월 중순 정도 되면은 쌀을 다 이제 수매하고 나면 할 게 없거든. 그리고 거기에서 돼지도 잡고 바람이 다 막아주니까 동네 어른들 와가지고 마당에서 윷놀이도 하고 그랬어.

저 집 가자라고 굳이 말하거나 저 집에서 초대하고 초대받고 이런 개념이 아니라 동네 들어와서 초입에서 보면 우리집이 뭔가 공터 같아서 느낌이 약간 아늑하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냥 1명씩 2명씩 들어왔어. 지금처럼 경로당은 또 없었어요. 없으니까 거기서 1명씩 2명씩 모이는 거야. 모여가지고 새끼도 꼬고 진짜 새끼 있잖아 볏짚으로 겨울에 볏짚 쌓아놓고 그거 앉아가지고 밧줄 만들었다고 농사용 밧줄, 그런 것도 동네 사람들 모여서 하고 돼지도 거기서 잡고 윷놀이도 했는데 검은 숯으로 그 시멘트 바닥에 이렇게 말판을 그려가지고 윷놀이 공간 만들어 가지고 사람들 돈 따먹고 또 돼지 잡아가지고 먹고 잔치하고 그랬지


근데 잘 생각해 보면 그 시대 때 물론 시골의 환경이 제일 위치 좋은 마당에다가 소를 키웠다는 거

한번 생각해 봐 전망이나 환기나 이런 거에 아무 개념이 없다. 시골은 근데 다 그래.

터좋은데다 소를 키웠어 근데 지금 생각해 보면은 그때 냄새 진짜 많이 났지 그런데 그냥 소가 있으니 냄새가 난다 그냥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어.


화장실을 잘못 건드리면 안된다는 믿음

축사옆에 빨간 창고가 하나 있었어, 지금 샤워실이 옛날에는 빨간 창고였어.

거기는 광 같은 걸로 쓰고 있었고 그 바로 뒤에 지금 샤워실에 그 세탁기 쪽 있잖아. 세탁기 바로 뒤에 보면은 쓰레기 쌓아놓은 데 뒤에 보면 약간 이렇게 알코브 져가지고 뒤로 절벽 쪽으로 공간이 있잖아. 거기에 화장실이 있었어. 푸세식 화장실. 그때까지도 푸세식이었지. 언제까지였더라 2006년도까지 푸세식 이였던 것 같은데 내가 24살 때인가 아니다 30살 때까지 푸세식이었어. 왜냐면 시골 사람들은 화장실을 건드리는 걸 엄청 겁내, 미신이 있거든. 화장실을 잘못 지으면 사람이 아프거나 죽는다 그랬거든. 그래서 내 기억에도 20대 초반까지도 집에 가면 그 푸세식을 썼다고. 둘째 누나가 어릴 때 아팠는데 그때 화장실 위치 옮겨서 그랬다고 어른들이 이야기하는 걸 들었었다니까

그러다가 아버지 아프시고 아버지 돌아가시고 장례식 다 치르고 난뒤에 집이 너무 이래서 어머니 혼자 못 산다 그래가지고 급하게 화장실 샤워실 다 깨고  그때 어쨌든 아버지 있었으면 못하게 했을 수도 있는데 돌아가셨으니까 샤워실 하고 화장실을 다 뭉개고 동네 업자 불러다가 1,200만 원인가 주고 그걸(화장실 공사) 했어. 미쳤지 진짜 왜냐하면 이제 장례식 끝나고 나니까 그때는 다들 서울 생활하고 나도 아주 어린 사원 대리였었고 공사라는 게 뭔지도 몰랐어. 그냥 일단 고쳐야 되니까는 동네 사람을 부른 거야.

완전 야매로 지금도 야매야 그 사람을 불러가지고 했는데 그때 현금이 어쨌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하니까 돈 정리하니까 돈 천만 원 정도 써도 되는 상황이 되서 이제 어머니 혼자서 사시니까 너무 지금 화장실도 불편하고 그러니까는 다 바꾸자고 그래서 거기를 밀어 가지고 바꾸게 된 거야.



요즘에도 우리는 미동댁네에 가서 가끔 집을 보수 한다.

그때 못 넣은 단열재를 지금 넣고 있다던가 벽에 페인트 칠을 한다거나

아버지를 쫄쫄 따라다니면서 시멘트를 바르던 아들의 아내, 어무이와 나란히 누워 건넌방에서 잠을 자던 딸들의 남편 그들의 자녀들도 함께 페인트칠을 하고 함께 모이는 이 집을 가꾸고 있다.


근데 공사는 사실 지금도 조금씩 하고 있지 그냥 다시 짓는 게 훨씬 나은데 집 밑에 암반도 있고 향도 애매하고 떼돈 들여 본격적으로 공사하기가 그렇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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