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현재까지
<나의 살던 공간은> 시리즈 연재 중이다. 아파트에 살던 삶을 제외하고 결혼 후 저층 주거지 내 다세대주택, 다가구주택, 양평의 단독주택등에서 살았던 것을 기록해 오고 있었다.
현재 살고 있는 집을 기록할 차례를 앞두고 있었는데 잠시 버퍼링이 걸려 잠시 쉬어가는 느낌으로 내가 머무는 물리적인 공간이 아닌 다른 개념의 공간에 대해 기록해 보려고 한다.
결혼을 한 뒤 짧게는 2년, 길게는 6년 주기로 주거지를 옮겨 다녔다.
자주 옮겨 다녀서 그런가 살았던 집 중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공간'이라는 단어와 매칭이 되는 공간은 잘 떠오르지 않는다.
살았던 집에서 '안정감'을 떠올리지 못하는 건 감정적으로는 서글프기도 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평생직장이 없는 현실 같은 거라서 당연한 일 같기도 하다.
한 곳에 터전을 잡고 살면서 평생직장이라 할만한 곳 근처에 사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사는 도시생활을 하다 보니 거주 공간도 직장을 옮기거나 휴대폰의 기종을 바꾸는 것처럼 주기가 짧아지고 기능적으로 취했다가 버렸다가 하는 것이 되어가고 있는 것일 뿐이다.
아무튼 사회적인 이유가 되었든 뭐든 간에 집이라는 공간과 나는 그렇게 진득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다.
물리적인 공간과는 이렇게 삐걱대는 관계를 맺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시간이 갈수록 오랜 관계를 맺으며 애정을 쌓아가는 '장소'가 있긴 하다. 그 장소는 내가 오랜 기록을 해오고 있는 '네이버 블로그'다.
자... 나의 네이버 블로그로 말할 거 같으면(갑자기 약장수 말투) 2013년부터 10년 이상을 꾸준히 이런저런 생각과 경험들을 기록해 왔고 프로젝트 마감 때가 아니라면 하루에 한 번 이상은 들어다 보는 '장소'로 나에게 '집'처럼 작용하고 있는 '공간'이다.
사진을 찍고 그 사진을 어떻게 보관할지 몰라 올리기 시작한것이 기초를 쌓는 일이었고
할 일이 없었던 시기 뭐라도 쓰자며 미용실 간 이야기, 맛있는 음식을 먹은 이야기를 하루에 한 개씩이라도 올렸던 행동이 골조를 만들었고
머릿속에 돌아다니는 생각들, 무분별하게 치고 들어오는 부정적인 감정들의 실체는 대단치도 않은데 나의 마음속을 혼란스럽게 하는 거 같아 그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끄적인 것들이 방들을 만들었다.
그렇게 지어올린 집이 나의 블로그다.
생각해 보면 집주소가 여러 번 바뀔 동안 블로그주소는 거의 10년 이상 유지 되고 있어 블로그 유알엘은 그 어느 주소보다 친숙하다.
이 블로그를 여는 순간 잊어버렸던 나의 생각을, 경험을 서랍처럼 열어보듯 하면서 꽤 안정감을 느끼기 때문에 고향집에 가서 느끼는 안정감(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같은 것을 느껴서 변화로 가득 찬 삶에 도움을 주는 것 같기도 하다.
기록을 좋아해서 그동안 네이버 블로그만 판 건 아니고 싸이월드,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브런치스토리, 스레드까지 여러 것들을 사용했다. 나는 그곳들에도 흔적을 적지 않게 남겼으나 네이버 블로그가 아닌 곳을 방문하고 흔적을 남기는 일은 집이 아닌 곳에서 한달살이를 하는 것과 같은 행위와 유사했다. 곧 시들해질 '머물기'였고 결국 돌아갈 나의 장소는 '네이버 블로그'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재밌는 건 블로그에 기록을 하려고 들어가는 일도 있지만 글을 쓰지 않아도 그냥 그 안의 내용물들이 잘 있나 한번 문을 열었다 닫는 느낌으로 들여다보는 일이 매우 잦은 것이다. 블로그에 들어가고 지난 포스팅을 열어보는 행위는 문을 열고 익숙한 공간에 들어가고 서랍 속을 열어 나에게 친숙하고 그럼에도 한동안 잊고 지낸 내 자아가 깃들어 있는 물건들을 재확인하는 행위와 유사하다. 집을 오래 비우게 되면 가까운 사람에게 ‘우리 집에 한번 들러서 확인 좀 해줘’ 부탁을 해야 하는데 블로그는 아무 때나 도둑이 들었는지, 누군가 진흙발로 들어와 댓글창을 어지럽히지 않는지 수시로 점검할 수 있는 특징을 가지고도 있어서 편리해서 그런 것 같다.
아무튼 이런저런 상상으로 네이버 블로그를 방문하는 것이 장소를 방문하는 행위 같다고 종종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독서모임을 통해 이푸투안의 <공간과 장소>를 읽게 되었다. 스스로는 절대 읽을 것 같지 않은 이 재미없는 책에서 장소는 물리적인 공간뿐만 아니라 내가 안정감을 느끼는 사람이 될 수 도 있다. 는 문장을 발견하고는 그동안 블로그를 대상으로 어렴풋하게 상상하던 것이 명확해진 기분이었다. - 블로그는 나에게 안정감을 주는 '장소'가 될 수 있다.
글 쓰고 기록하여 남기기를 좋아하는 편이기도 하지만 그 곳에 장소성과 장소가 주는 안정감이 없었다면 이렇게 일관적인 방식으로 꾸준히 카테고리들을 정리하고 정원을 가꾸듯이 썸네일들을 나열하기는 어려웠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고 보면 인터넷 '공간'과 인터넷 ‘주소'라는 말 자체에 이미 장소가 될만한 기본요건을 갖추고 있다.
나아가 인터넷 공간이 부동산 시장이 지닌 특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중심지와 변두리의 입지로 만들어 내는 격차처럼, 유동인구가 많은 상업지역이 고가이듯 사람들이 많이 찾는 팔로워가 많은 계정은 높은 수익을 창출한다.
더 나아가서는 너 어디 살아? 고향이 어디야?로 파악하는 어떤 사람의 정체성보다 개인의 sns계정에 진열한 방식과 내용으로 그 사람을 파악하는 방식이 더 유효할 때도 있다.
처칠의 “우리는 건물을 만들고 건물은 다시 우리를 만든다( We shape our buildings, and afterwards our buildings shape us)” 는 문장을 꽤 신뢰하는데 안타깝게도 한국의 주거는 59, 84의 틀에서 남향에 거실과 부부침실, 거기에 욕실과 드레스룸이 딸린, 거실의 소파는 텔레비전을 향하는 평면으로 획일화되어 있다. 요즘은 가구배치와 전자제품 스펙까지 비슷해져 가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건물을 만들고 그 건물로 우리가 만들어진다고 말해도 되는지 의문이 든다. 다 똑같이 만들어지지 못해 안달 난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안 그래도 자연 생태계와 마찬가지로 인간에게도 다양성이 중요한 반면 우리 현실은 전 국토가 같은 유형의 아파트평면, 정상가족이데올로기 추구, 꽉꽉 채운 사교육등으로 한 방향으로 치우쳐 기울어진 쪽이 기형적으로 곪아 가는 감각을 자주 느끼기 때문이기도 하다.
획일화된 공간만큼이나 획일적으로 변형되어 가고 있는 삶의 방식에서 나라도 좀 벗어나고 싶어 파빌리온 같은 집, 향에 얽매이지 않는 집, 층고의 높낮이가 다양한 작업실을 만들어 나의 잠재된 영혼을 공간을 통해 흔들어 깨우고 싶지만 결국엔 자산이 없어 나만의 공간과 장소를 만들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결국 온라인 장소에 대한 애착이 생기게 된 것 같기도 하다. 그곳에 나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을 계속 덧바르고 쌓아올리는 중이다.
오늘도 자연스럽게 눈을 뜨고 스마트폰을 열고 네이버 블로그라는 공간으로 들어간다.
블로그에 최초로 쓴 글은 (지금은 비공개 처리가 되어있지만) 2009년 12월 23일이다. 글을 쓰고 있는 현재 (2023년 8월 28일) 4996일이고, 13년, 8개월, 10일이 지나고 있다.
내가 무언가를 기록하는 곳이 곧 나의 집무실, 나의 휴식장소, 이 장소가 곧 나 자신 이라고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