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또 Apr 07. 2017

참으로 고맙네요

일상, 네덜란드 #9. 중간점검

(물론 고맙지 않습니다. 제목은 비꼰 거라는 사실을 집고 넘어가고 싶네요.)


  이 곳에 온 지 어느새 남은 시간보다 보내온 시간이 더 길어졌다. 첫 글에 작성한 것처럼 난 적응 하나에는 재능이 있었나 보다. 어느 것 하나 뜻대로 되는 것 없어 징징거리던 글이긴 했지만 이젠 웬만한 기본 생활은 모두 적응해 편하게 지내고 있다. 점점 돌아갈 날이 다가올수록 아쉬워지는 걸 보니 그래도 잘 살아왔나 보다. 

  아직 요리를 할 때 화재경보기를 울리긴 하지만, 손을 탁탁 털고 의자를 밟고 올라가 버튼을 누르며 화재경보기를 끄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 하우스셰어 하는 친구들과는 아직 청소 문제들로 옥신각신하고 있지만, 뭐 같이 샹그리아를 만들어 먹는 등 웃으며 잘 지내고 있다. 도시가 작은 탓에 자전거를 타고 순간순간 내키는 방향으로 돌아다녀보면서 이 곳에 오래 살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아름다운 곳들을 발견하기도 하고, 네덜란드어가 막힐 때에는 구글 번역 앱의 AR 기능에 박수를 맘껏 보내며 스마트 시대에 스마트하게 적응했다. 심지어 영어가 막히더라도, 나를 탓하기보단 상대방을 내 영어에 적응시키는 뻔뻔함까지 생겨버렸다. 오히려 교환학생 때보다 더 삶에 밀접하게 세세하게 익숙해졌다.

  징징거리며 첫 글을 작성하였을 때, 나는 적응은 하되 익숙함에 속아 새로운 것을 놓치지 말자는 다짐을 했었었다. 매일 다니는 출근길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눈치채지 못하고, 어느새 익숙해진 일상에 한국과 같은 생활을 반복할까 걱정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실 처음의 예상과 다르게 저런 다짐 따윈 필요 없는 지금이 되었다. 겨울에서 봄이 되어가며 출근길이 하루하루 더 아름다워져 눈길을 멈출 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꾸준히 이 곳이 새롭게 느껴지는 이유. 내가 이 곳 사람이 아니구나의 느낌을 받게 되는 순간. 정기적으로 겪곤 했던 나의 생김새 문제 때문이다. 아, 이렇게 말하니 뭔가 슬프네.



  날씨 좋은 날이었다. 한 시간 정도 기차를 타고 당일로 놀러 갈 계획이었다. 기분 좋게 기차에 올라타 빈 좌석에 앉았다. 그리고 기차가 출발하기 직전, 내 옆엔 다른 아저씨가 급히 앉았다. 기차가 출발한 후, 나도, 내 옆의 아저씨도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십여 분이 지났을까, 옆에서 말을 걸기 시작했다. 한글 책을 읽고 있었던 관계로 어느 나라 문자냐에서 시작해 문화 이야기, 세계 가수 싸이 이야기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오갔다. 그때까진 동양에 관심이 많으신 친절한 아저씨구나 싶어 재미있게 대화했지만, 점점 대화가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시시때때로 나오는 넌 너무 예뻐, 넌 정말 환상적이야, 넌 진짜 아름다워 등등의 말들... 은 의심쩍어 하기에 충분했다. 내가 창문 쪽에, 그 아저씨는 통로 쪽에 있었기에 어떻게 자리를 옮길 수도 없었다. 그냥 무시하고 책을 읽겠다 선언한 후 이어폰을 끼고 책을 읽는 척을 계속하였지만 옆에선 일방적으로 내게 계속 외모적 칭찬을 보내올 뿐이었다.

   다행히도 내릴 역에 금방 도착하였고, (참으로 우연히도) 같은 역에서 내린 그 아저씨와는 대충 인사를 한 후 빨리 다른 곳으로 피했다. 그렇게 금방 잊어버리고 재미있는 하루를 보냈었지만, 큰 일은 돌아오는 기차에서 일어났다. 같은 기차, 그리고 심지어 같은 차량에서 갑자기 내게 또 반갑다며 인사를 하는 그 아저씨를 본 순간, 너무 충격을 받았었다. 물론 엄청난 우연이기도 하지만(인연이라고는 하고 싶지 않다), 사실 스토킹을 당하면 이런 기분이겠구나 하는 무서움까지 느껴졌다. 그렇게 그 아저씨는 또 내 옆에 앉아 내 칭찬을 하기 시작했고, 나는 중간 환승 역에서 그 아저씨와 같은 기차를 타지 않기 위해 계획적으로 기차를 타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알게 된 사실인데, 그 날 오전 아저씨는 나와 같은 역에서 타서 우연히 내 옆에 앉은 것이 아니라, 이미 다른 곳에 앉아있다가 저 멀리서 날 지켜보고 (친히) 자리를 내 옆으로 옮겨 앉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음 기차를 기다리며 벌벌 떠는데, 내가 추워서 떨고 있는지 소름이 돋아 떨고 있는지 구별이 가지 않았다.


  이 곳에서의 나의 동양적 얼굴은 누군가에겐 환상이다. 내가 관여하고 싶지 않은 환상. 누군가는 그냥 운 안 좋게 무례한 사람에게 걸렸네, 싶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내 옆자리가 비어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리고 내 동양적 배경의 얼굴만으로 그러한 무례함을 겪어내야 했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이 나를 보고 배시시 웃으며 소리를 지를 때도 있고, 내가 아무리 노려봐도 계속해서 날 신기하듯 쳐다보는 사람도 있다. 나는 서 있는 것 만으로, 걸어가는 것 만으로 누군가의 불쾌한 시선을 받았다. 물론 이런 사람이 많았던 것은 아니지만, 잊을 때쯤 꼭 한 번씩 일어났다. 절대 잊지 말라는 것처럼.

  달갑지 않은 환상이라지만, 그래도 자화자찬하며 혼자 위로라도 할 수 있지, 나의 동양적 얼굴은 누군가의 환상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화풀이 대상이기도 했다. 술집 앞에서 친구를 기다리며 서 있을 땐, 어느 술 취한 사람이 내게 욕설과 함께 중국에나 돌아가라고 소리지르기도 하고, 초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애들이 뒤통수에 눈을 던지고 도망가기도 했다. 같이 있던 언니가 아이들을 따라가 화를 냈지만, 의미 없는 사과를 받아냈을 뿐이었다. 그나마 내가 사는 동네가 안전하고, 덩치가 있는 체격 덕에 이런 취급을 덜 받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내겐 충분했다. 잊을 때쯤 꼭 한 번씩 일어났다. 절대 잊지 말라는 것처럼. 이렇게 고마울 수가 있나.

  물론 정말로 고마운 일도, 그리고 사람도 훨씬 더 많다(네덜란드 사랑합니다). 닫힌 슈퍼 앞에 멍하니 서 있을 때 주위에 열린 다른 슈퍼를 알려 주는 사람도 있고, 어떤 기계의 사용법을 모르겠을 때 친히 옆에서 하나하나 알려주던 사람도 있었다. 이 곳의 시간에, 혹은 이 곳의 생활에 익숙지 않은 모습을 보일 때마다 배척하지 않고 따뜻하게 알려주던 사람들이 참 많았다.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스해질 정도로. 내가 보트를 타고 황량한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다 한다면, 그분들은 따스한 햇살과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위의 불쾌한 일들은 어느 순간 나타나 성난 파도를 주기적으로 일으키며 나를 흔들었다. '우리 바다에서 꺼져!'하는 느낌으로. 아무리 날씨가 좋았더라도, 어느 순간부터는 흔들리는 보트에 집중할 뿐이었다. 


  나는 내가 어느 순간부터 한국과 별반 다르지 않은 생활을 할까 두려웠었다. 단순한 출퇴근을 반복하며 주어진 일만 하고 소중함을 잊을까 걱정했었다. 그래서 '이방인'임을 잊지 말고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보자 다짐했다. 그리고 현재, 오 개월 전으로 돌아간다면, 멍청한 생각 하지 말라며 한 대 때렸을지도 모른다. 절대 같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이방인일 뿐이고, 이는 절대 잊을 수도 까먹을 수도 없었다. 또한 이로써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감수해야 하는 것 역시 오롯이 내 몫이었다. 처음엔 '이방인'임을 강조하고 이방인의 관점을 잊지 말자 했지만, 잊긴 커녕 난 영원한 이방인일 테니까! 참 고마운 사람들이 항상 내게 다양한 방법으로 이 점을 상기시켜주기 때문에 전혀 걱정할 필요가, 각오해야 할 수고가 없었다. 그냥 내게 집중하면 될 뿐이었다. 

  그 당시, 내가 한국에서처럼 지내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고 싶었던 점들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환경의 문제가 아닌 나의 문제일 뿐이었다. 내가 변화해야 할 점들을 환경이라는 요인을 핑계로 삼고 있더라. 이 새로운 환경이 새로운 나를 만들어줄 거야, 라는 반짝반짝한 환상과 함께. 새로운 환경은 새로운 경험을 낳을 뿐, 내가 변해야 할 점은 내가 바뀌어야 할 점일 뿐이다. 

  이 곳에서 지내온지 절반이 되어가는 마당에, 나는 숨만 쉬어도 기본이 이방인임은 알게 되었으니 새롭게 겪게 된 사회와 경험에만 집중하자. 여성 인권이 보장되는 직장이란. 여성의 신체만 신성화되는 우리나라와 달리 남성, 여성 상관없이 나누는 열린 대화란. 디자인 가치가 높은 나라에서의 디자인 프로세스란. 소수자들의 인권이, 일상생활이 보장되는 환경이란. 개개인의 개성이 독립적이며 자유롭다는 것이란. 낡은 일상 용품과 대비되는 수준 높은 의료 서비스란. 그냥 느끼고 정리하자. 고마운 분들 덕분에 괜히 한 발짝 물러서서 바라보지 않아도 되니 느낀 것들만이라도 잊지 않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https://brunch.co.kr/@hhanng/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