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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렉스키드 Jun 27. 2024

처음 보는 아파트 이웃들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下)

차가운 현관문을 가운데 두고, 수많은 나의 겪어온 삶들을 마주했다.

임차인을 구하기 위해 시작된,

구축 아파트 심폐소생 프로젝트 그 두번째-

구축 아파트 공사를 왜 시작하게 되었고, 공사 방법에 대한 자세한 팁은 아래 에피소드를 참고

https://brunch.co.kr/@alexkidd/119​​


대장정의 시작, 샷시 공사의 날이 밝았다

이미 아파트 리모델링을 성공해본 경험이 있어, 샷시 공사 같은 큰 공사 일정 확정 및 셀프 페인팅, 수리 등 일정 및 공정 나누기 등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두번째 경험이고, 전보다 상태도 나았던 이 아파트에 대한 부담이 너무 적었던걸까. 가장 중요한 실수를 하게 되었다.


바로 “이해관계자 사전 합의”를 완전히 잊었던 것이다.


여유로운 공사를 기대했던 당일, 예견치 못하게 터져버린 사건 이야기는 아래 에피소드를 참고

https://brunch.co.kr/@alexkidd/94

현장으로 향하는 상황에 시공 담당자분에게 받은 전화 한통에 정신이 아득했지만, 위기 상황에서 무책임하게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없다는 어른의 결정을 내리고 이내 실행에 옮겼다.


전편과 이어지는 이야기다보니,
구분 숫자도 전편에 이어서 쓰게 되었습니다


어른이 되면서 배운, 가장 큰 덕목은 “유연함”과 “담담함”이다. 크게 당황해봐야 변하는 것이 없다는 어른스러운 사고.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온 마음을 담아 사건을 해결하는.

#5.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사람은 가장 적나라하게 스스로를 마주할 수 있다.


일대광풍이 머리와 가슴을 치고 지나갔고,

나는 누구보다 침착해지려 애 썼다. 당황할수록 뭘 할 수 있을지 생각하자.


가장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보이는 사람의 모습이 진정한 자아라고 나는 생각한다.

인생을 살면서 크게 당황할 일? 그리 많지 않다. 나이가 들어가며 '적당히 큰 일 없이 지나간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회사에서도, 관계에서도 늘 '어느 정도의' 임기응변이 통하니까.


하지만 이번엔 아주 많이 당황했다.

왜 미리 뭔가를 안 했을까 라는 후회와 자책이 밀려 들었고, 내가 끔찍히도 싫어하는 '무책임한 어른'의 모습으로 빚어지고 있는 상황에 몸을 가눌 수 없었다.


극심한 쇼크의 상황. 나는 어떻게 반응할까?

놀랍게도 나는 '사과하고 숙이는 쪽'을 선택했다.

평소에도 '싸우기보다는' 좋게 협의하고 상대방과 예의를 지키는 편을 좋아하지만, '논리'와 '입장'에 대한 정리를 내세울 때는 아쉬운 소리도 점잖게 그러나 정확하게 지적하는 편인데


이번엔 반성하고 나의 우를 정면돌파하는 선택을 내린 것이다.


관리사무소, 시공팀에게 번갈아 전화를 하며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고, 시공팀이 주차 공간을 확보하고 짐을 내리는 동안 관리사무소에 양해를 구했다.


사다리차를 올리기 전에, 최소 옆집과 아랫집만이라도 구두로라도 합의 부탁 드린다고 말씀드렸고, 시공 소장님은 그렇게 하겠다고 말씀하셨다. 관리사무소에도 곧 도착하니 시끄러운 소리 나는 부분은 최소화하겠다고 말씀드렸다.


이 통화를 할 때 쯤, 언덕 너머 내 아파트가 보였다.


어른답게. 핑계대지말고 책임질 것. 세상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 함께 뭔가를 만들어가는 곳이니까. 담담히 받아들이고 제대로 표현하자. 미안하면 미안하다고.


드디어 도착한 관리사무소-


문을 열고 들어가서 바로 고개를 숙였다.

책임감 있는 어른답게.


"정말 죄송합니다. 선생님.
제가 큰 공사는 처음이라서요.
너무 난처하셨겠어요."

관리사무소 측에서도 상황이 조금 진정이 되셨는지, 처음 전화주셨을 때보단 누그러진 태도로 말씀을 해주셨다.


"어쩔 수 없으니 공사계획 공지문은 지금이라도 로비에 붙여주시고, 시공 동의서는 최대한 많이 받아주세요. 민원이 들어오면 저희도 사실 너무 입장이 난처해져서요."

"네네. 죄송합니다. 제가 잘 정리하겠습니다. 별 것 아닌데 이것 좀 드세요"하고 병 음료 한 박스를 드렸고, 안주셔도 된다고 거절하시는 걸 안겨드렸다.


자. 이제 시공 동의서를 들고 꼭대기층으로 올라 간다.

병 음료 몇 박스를 두 팔에 들고 끝까지 걸어 올랐다. 하필이면 엘리베이터가 공사중이라,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가장 시끄러운 타이밍에 무조건 인사를 해야된다라는 되게 "옛스러운" 고집으로 한번도 쉬지 않고 끝까지 올랐다.


도착한 꼭대기 층 내 아파트에서, 시공팀 소장님에게도 마찬가지로 인사를 드렸다.

"소장님, 죄송해요. 너무 고생하셨어요.
제가 챙겼어야되는데 너무 고생하셨습니다."


"아닙니다. 이런 일 저런 일 다 있죠. 괜찮습니다. 그래도 선생님께선 직접 이렇게 말씀도 잘 해주시고, 챙겨주시니 괜찮습니다. 몇 주 전에는 똑같은 일 있어서 전화 드렸더니 '그런건 알아서 해줘야하는 것 아니냐'는 식으로 좀 불쾌하게 말씀하셨어요."


"아 그런 사람들 있죠.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그냥 현장 접고 나왔어요.
그런 상황에서 뭘하겠어요."
사람을 대하는 일을 하는 분들일수록, 진정성을 중시한다는 내 신념이 옳다. 이 분이 정말 현장에서 철수하셨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지금 내 선택의 방향이, 일찍 와서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한 타인에게 어느 정도 진심을 전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드링크 음료 한 병 따서 드리고, 같이 일하시는 분들께도 드리고 준비해 간 종이컵과 음료, 물을 한쪽에 마련해뒀다.


공사 설명을 들으며 현장을 보고 있는데,

사다리차가 철수한다.

다행히 시간에 맞춰 보낼 수 있었고, 소장님께 '사다리차 때문에 너무 고생하셨다'는 한마디를 다시 드리면서, 이중주차의 틈에서 '다섯 자리나 주차공간을 확보한' 그들의 노력에 다시 한번 감사함을 표현해드렸다.


엘리베이터 고장. 부족한 주차면 확보. 이정도면 최악의 상황이다. 발주자가 책임지지 않으면 누가 책임질 수 있나? 감당하자. 어른답게. 사건의 진원답게.


#6. 그리고 지금부터는, 아파트의 처음 보는 이웃들에게 사과를 건내러 가자.

시공 동의서를 들고, 옆 집의 초인종을 눌렀다.

일반적으로 위 아래로 3개 층 정도는 양해를 구해야 한다. 가장 시끄럽고 피해를 볼 수 있으며, 관리사무소로 민원을 언제 연락해도 이상하지 않을 분들이다.


나는 15층부터 1층까지 모든 세대를 찾아가는 방법을 선택했다. 몇 개 층만 피해를 보고 몇 개 층은 피해를 보지 않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정공법으로 가자. 사과는 아끼지 않는 법이다.


초인종을 누른다.

심호흡을 한 번 하는동안 "누구세요"라는 응답이 들려 온다.


네 안녕하세요 00호에서 왔습니다.


문이 열리고,

처음 보는 이웃분의 얼굴을 마주한다.

꾸벅 인사 드리고, 목소리와 제스처에 미안한 마음을 가득 담아 사과를 건낸다.


"오늘 저희 샤시 공사가 있어서 너무 시끄러우셨죠. 제가 이런 공사는 처음하다보니 미리 말씀 못 드려서 너무 피해를 끼쳐드려서요. 정말 죄송합니다."


사과를 건내고, 상황에 대해서 공유한다.

"지금 사다리차 작업은 다 끝났습니다. 그 전에 미리 양해를 못 구해서 죄송하고, 그라인더 작업 조금 하면 시끄러울 일은 없을 것 같아요. 조용히 마무리 짓겠습니다."


친절한 대답을 바라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그래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요즘 세상이 남의 실수와 피해유발에 어디 그리 관대할까. 그저 도리를 다하자는 생각으로 벨을 눌렀다.


#7. 그래서, 나의 이웃들은 어떤 분들이셨을까?


그렇게 인사를 다닌 29개 가정의 이웃들.

짧게는 3분 길게는 5분까지 어떤 분들이 계셨을까.


A. 상황을 이해해주시는 너그러운 분들

감사하게도 대부분이 이 경우에 해당했다.

 “워낙 낡았으니, 당연히 공사할 수 있다"고 첫 말씀을 떼신 어머님 나이 또래의 여성분

"저희는 워낙 층이 달라서 소리를 못 들었습니다"고 오히려 잘 말씀해주신 내 또래의 남성분

"그럴 수 있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라며 처음엔 경계하다가 내 눈빛과 표정을 보며 인상을 풀고 아들 보듯 바라봐주시던 노신사분

"주인이시면, 혹시 언제 들어오시냐. 여기 뒷산도 있고 교통도 너무 좋다"고 좋은 아파트에 왜 안 들어오시냐고 진짜 이웃집 이모처럼 말씀을 한참 나눈 여사님,


하나 같이 이해해주시는 마음이 너무 감사했고,
'경계'하는 눈빛에서 '공감'하는 목소리가 돌아오는 순간에는 전율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어릴 때 아파트에서 봤던 동네 형,
이모, 할아버지들이 다 이런 표정이었지.

이런 분들이 적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많아서 참 다행이었다.


B. 아쉬운 부분을 말씀하시면서, 받아주시는 이웃

 "업체세요? 아 주인이예요? 그래도 이런 건은 미리 동의받고 해야되요."라고 말씀하시며 그래도 애써 웃어주신 형님 뻘 되시는 분.


다행이다. 주인인 내가 직접 오길 잘했어 라고 생각했다 업체에서 찾아갔으면 이렇게 넘어가지 않았겠지. 누군가를 또 다른 곤경에 처하게 만들고 싶진 않다.


내 공사비에 일하시는 분들의
대리 사과는 들어있지 않으니까

물론 주차 문제를 해결하시며 이미 한차례 안겨드렸지만, 더는 죄송함을 맡겨드릴수 없다.


아름다운 세상을 원하지만, 그것이 어려움을 알고 있다. 오히려 나이가 들면서는, 내 잘못을 왜 남이 이해해주길 바래야하는지 라는 생각마저 든다. 그게 편하다, 마음이.


C. 불편함을 토로하시는 이웃

 "아무리 그래도 미리 말은 했어야죠. 나는 엘리베이터 공산지 뭔지 영 시끄러워서 어디 물어보지도 못하고 얼마나 불편했다고."

네. 어머님, 정말 죄송해요. 제가 잘 챙겼어야되는데..

"(말을 끊으며) 여기 지금 손주도 있고 애기도 재우고 하는데 너무 불편해 정말. 빨리 좀 끝내줘요."


당연한 반응이다.

내일도 아니고 당장 오늘, 이미 소음이 벌어지고 있는데 나라도 그럴 것이다.


그래도 동의서에 서명도 해주시고, 이렇게 문을 열고 대화에 참여해주시니 미안한 마음을 전할 길이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D. 문조차 열지 않는 이웃

"누구세요?"

네 00호에서 왔습니다. 오늘 공사해서 말씀 좀 드리려고 합니다.

침묵 (옷을 입으시나?)


5분 정도가 지나서, 다시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아 네 선생님 저 오늘 공사 때문에 왔습니다.

"(신경질 가득한 말투로)아 그러니까 왜요"

미리 알려 드렸어야하는데 좀 죄송해서 얼굴 뵙고 인사 드리려구요.

"알았어요. 됐어요."


동의서 내기 싫다는 우회적(어쩜 가장 강한 메시지로)인 표현. 더 나가면 어차피 남한테 피해줘놓고 무슨 할 말이 더 있냐는 제스처


현관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희미한 목소리를 나누며 서로의 표정을 추측하는 것으로, 대화는 짧게 끝났다.


차가운 현관문은 단순히 공간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누군지 모르는 뜨내기'와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신경질적인, '불필요한 접촉을 만들고 싶지 않은데 뭘 이렇게 성가시게 구냐'는 느낌으로, 감정의 여과가 아닌 '증폭제'가 되어 나에게 던져졌다.


차갑고 날카로운. 인생은 그런 것이다. 너와 내가 분명히 나뉘어져 있고 우리는 굳이 우리가 될 필요가 없다는, 현대사회 필수 덕목같은 것.


#8. 아파트보다 더 나이가 든 나라서, 다행이다.

다행이다. 내가 40세의 어른이라서.

타인의 감정을 존중하지만, 그 감정을 나에게 전이시키지 않는 법을 체득한 그런 어른이라서

필요 이상으로 화를 내서 내게 쌓인 감정을 털어내려 애쓰지 않는 어른이라서

왜 그랬을까 하고 누군가의 입장을 자꾸 추측하며 내게 유리한 해석을 이끌어 내지 않는 어른이라서

타인과의 감정의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많이 마음이 닳고 단단해진' 어른이 되어서


그래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하다. 이것이 내가 아는 일반적인 현대사회의 관계다.

이 현관문 너머로 그녀가 나를 궁금해할 이유도 없듯이, 나도 그녀의 지금까지의 삶을 반추하여 내게 유리한 해석을 내릴 필요도 없다.


나는 그저.

지나가는 사람이고, 잠시 시끄러웠던 소음 중의 하나가 되는 것이다.

굉장히 심플하다. 아파트의 삶이라는 건. 어느순간부터 이사오는 집에서 떡이나 과일을 가지고 오지도, 떠나는 집에서 작별인사를 남기지도 않는 그런 삶을 살고있지 않았나.


불편을 주면 주는대로, 호의를 주면 주는대로-

딱 이 차가운 현관문의 온도만큼만 살면, '우리'라는 거추장스러운 관계의 의무들로부터 어른인 나는 자유로워지지 않던가.


그 뒤로 방문한 두 군데의 집은 참 따뜻하게 나를 받아주셨다. 그들 덕분에, 문전박대 당한 상황과 감정에 대해서 완전히 잊을 수 있었다.


적지 않은 수의 이웃들에게서 받은 시공동의서를 들고 관리사무소에 찾아갔고,

담당하시는 분은 제법 되는 동의서에 안심하시는 표정으로 고생하셨다고 말씀주셨고,

나는 다시 한번 "불편하게 해드려 죄송합니다."라고 인사를 꾸벅 드렸다.


담당자분은 처음으로 웃어주시면서 인사하셨고, 아침에는 한숨을 쉬시던 옆자리 직원분도 내가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에 '안녕히 가세요'라고 인사를 건내 주셨다.


길었던 하루. 그러나 결국 내가 원하던 결과를 만들어냈다.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고 동의를 얻어냈고 공사를 완수했다. 그리고 어른다운 내 모습까지 볼 수 있었다. 더할 나위 있나?


부슬부슬 내리던 비는 작고 단단한 결정이 되어 하늘에 흩뿌려지고 있었고,

나는 지금까지 펼쳐진 많은 상황과 감정들을, 하나 둘 포개어서 여분의 시공동의서(서명 받지 못한)와 함께 쓰레기통에 버려뒀다.

 

나의 선택에 모두가 동의할 수 없다.

나의 감정에 모두가 공감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내가 지키는 가치를 지키고 사는 삶이 옳다고 이렇게 느끼는 것이다.

왜 그렇게까지 하냐고 물어보면, 나는 오늘처럼 스스로에게 대답할 것이다.

사람은 사람을 위해서 사니까.

 

오래된 아파트 덕분에,

그만큼 어린 시절의 내 인심 넉넉하던 그 이웃들을 떠올릴 수 있었고,

그보다 더 장성했던 20대 시절의 까칠한 나도 만날 수 있었다.


오늘 처음으로 본 많은 이웃들의 모습이 반가웠던 건,

아무래도 '철문 너머에서 감정을 증폭시키는' 내 과거의 모습에서-

문을 힘껏 열고 처음 마주하는 '이웃'을 내 삶에 한 걸음 들이려는 그 어른의 용기가 생겼다는 발견이. 가장 즐거웠기 때문이다.


나답게. 어른답게.


투자자들은 얘기한다.

내 물건과 사랑에 빠지지 말라고.

그러면 팔아야할 때 못 판다고.


백번 이해되는 말이다.

그러나 사람이 어찌 생각되로만 되겠는가.

이렇게 내 삶을 담아내는 집인데.


나중에 누가 내 아파트를 가져갈지,

그는 분명 복된 사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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