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도 비 오는 날이면, 학교 앞에 세워져 있는 아빠 차를 그려본다
나는 비가 오는 날이면, '누군가가 나를 데리러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멍하니 비 오는 하늘을 바라본다. 내 손에 우산이 있는 날에도, 막연히 누군가 나를 찾아와 주기를 기다린다. 어릴 적 초등학교 앞에서 친구들을 기다리던 부모님이 그리도 부러웠던 나는, 어른이 된 아직도 오지 않는 누군가를 기다리며 비 오는 풍경을 바라보는 버릇이 생겼다. 다행히도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트럭 운전수인 친구 아버지의 차를 종종 얻어 탈 수 있었다. 그 투박한 트럭 조차 내게는 어찌나 부럽던지. 가끔 비가 억쑤같이 쏟아지는 날이면, 친구가 아버지께 전화를 걸어 학교 앞으로 데리러 와달라고 하기를 마음 속으로 기다리기도 했다.
우리 아빠에게는 오토바이를 끌 수 있는 원동기 면허가 있었지만, 자가용을 몰 수 있는 운전면허는 없었다. 주행시험 날마다 술에 취해 시험장에 가지 못하거나, 시동도 걸기 전에 쫓겨났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매일매일 술잔을 기울이는 아버지께 운전면허가 없는 게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어쩌면 하늘에서 아버지가 평생 자동차 핸들을 잡지 못하게, 운전면허 시험날마다 아버지께 더 달달하고 맛있는 소주를 선물했는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그렇게 하늘이라도 원망하고 싶을 만큼, 아버지의 운전면허 획득을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운전석에 앉은 아버지, 조수석에서 아버지께 간식을 챙겨드리는 어머니, 그리고 뒷자리에서 티각태각 장난치는 오빠와 나의 모습을 백만 번도 넘게 상상하는 사이, 나의 유년시절은 끝이 났다.
내가 고등학생이 된 후, 우리 집에는 '엄마 차'가 생겼다. 집수리로 잠시 장사를 쉬게 된 어머니께서는 큰 용기를 내어 아버지 먼저 운전면허를 따셨다. 나는 '아빠 차'가 아니라는 사실이 내심 아쉬웠지만, 난생 처음 만난 자가용에 신나는 기분을 주체하지 못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겁이 많은 어머니 덕에 나는 한번도 편히 자동차에 오른 적이 없었다. 나는 어머니의 차를 탈 때마다, 운전석 뒷자리에서 안전벨트를 부여잡고, 부디 안전하게 귀가하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해야만 했다. 우리는 어머니의 서툰 운전솜씨에 화난 운전자들이 항의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차에 타자마다 문부터 잠그는 습관이 있을 정도였다. 어머니는 오르막길이 나타날 때면, 정글에서 맹수를 만난 사람처럼 두 손을 불끈 쥐고 몇 번이고 심호흡을 고른 후에야 액셀을 밟으실만큼 운전을 무서워하셨다.
이러한 이유로, 군대 간 오빠가 휴가를 나올 때마다 엄마 차는 '오빠 차'로 둔갑한 채, 고등학생이던 나의 학교 앞으로 찾아왔다. 운전실력이 좋은 오빠가 나를 데리러 온 날이면, 으레 세네 명의 친구들이 동승을 했다. 그래서 우리 오빠는 내 친구들 사이에서 언제나 인기가 좋았다. 오빠는 제대 후 본인의 돈을 모아 진정한 '오빠 차'를 마련했다. 나는 명절 때마다 오빠네 학교를 찾아가 함께 포항으로 향했는데, 그 당시 내게 '오빠 차'는 장거리 운전에서도 절대 잠이 들어서는 안 되는 공포의 차로 각인되어 있었다. '감히' 오라버니가 운전하시는데 내가 혼자 잠을 자서는 안 되는 차, 오라버니께서 '친히' 운전대를 잡고 계시니 각종 간식과 주행 중 틀 노래를 사전에 준비해야 하는 차. 차라리 '오빠 차'가 사라지고 칙칙폭폭 새마을 기차에 몸을 싣고 싶다는 생각을 백 번 즈음하고 나면, 우리는 안전히 포항 집에 도착해 있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역시 집안에 자가용이 생기니 편한 일이 많아졌다. 명절마다 삼촌들 차에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타는 일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원할 때마다 큰 마트로 달려가 필요한 물건을 한꺼번에 실어 나를 수도 있게 되었다. 여전히 바쁘신 부모님 덕에 가족끼리 교외로 나들이를 가는 일은 없었지만, 급한 순간에 출동할 수 있는 기동력이 생겨난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엄마 차'도 '오빠 차'도, 내가 오랫동안 품어왔던 '아빠 차'에 대한 동경을 채워주지는 못했다. 내가 원한 아빠 차는, 안전한 운전을 책임지는 아버지의 운전실력과, 피곤한 나를 어디든 안락하게 데려다줄 따스한 배려가 있는 차였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 '남편 차'가 생겼다. 최소 14년이란 세월 동안 남편과 함께 해 온 골동품. 4년 전, 타들어갈 듯 더운 여름날, 우리는 처음 만났다. 나는 당시 남자친구였던 남편을 만나러 독일을 방문했었고, 남편은 내게 본인의 자동차를 타고 독일의 도시들을 여행하자는 제안을 했다. '아빠 차'에 굶주린 내게, '남자친구 차'라니. 내게 남편의 제안은 너무나도 달콤하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현실은 나의 상상만큼 달콤하지 못했다. 40도에 육박하는 날씨에, 에어컨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편은 그제야 이미 오래전에 에어컨이 유명을 달리했음을 밝혔다. 우리는 에어컨이 고장 난 문 두 짝짜리 소형차로, 8월의 이글거리는 아우토반을 쉬지 않고 달렸다.
독일 생활을 시작한 지 몇 개월이 지났을 때였다. 퇴근 후 회사 사람들과 축구 경기가 있던 남편이 나에게 차를 가지고 데리러 와 달라는 SOS를 날렸다. 차마 땀 냄새가 심해 지하철을 탈 수 없을 것 같다는 것이 이유였다. 장롱면허 소유자인 나의 실력에도 어렵지 않은 단순 코스이니, 운전연습 겸 자신을 보러 와 달라는 것이었다. 한국에 있을 때, 가끔 공원에 들러 운전연습을 해봤던 터라, '연습대로만 하자'는 생각으로 용기를 내어 'Okay' 사인을 날렸다. 그리고는 열쇠를 들고 차가 주차되어 있는 길가로 향했다. 그러나. 나는 차를 움직이지도 못한 채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남편의 차가 수동 스틱으로 움직이는 녀석이었기 때문이다. 생각지도 못한 복병에, 나는 부웅-부웅- 단 두 번의 굉음을 낸 후 깔끔히 차키를 빼어 들고 집으로 향했다.
이 골칫덩어리 '남편 차'는 이제 나의 '슈퍼카'가 되었다. 멋져서 슈퍼(Super)가 아니라, 3분 거리의 동네 슈퍼만 왔다 갔다 하는 '슈퍼마켓'용 차가 된 것이다. 장은 봐야 하니, 생존형으로 시작된 수동운전이 이제는 나에게 커다란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고 있다. 부모님께서 독일에 머무실 때도, 나는 자랑스럽게 열쇠를 꺼내 들고 부모님을 슈퍼까지 '나름' 안전하게 모셨다. 하지만 우리 집 유일한 운전면허 미소지자인 아버지께서는 나의 운전에 딴지를 거시며 몇 번이고 '딸내미 차'에 탑승 거부를 외치셨다. 나는 그런 아버지께 '아빠 차로 비 오는 날 데리러 오지 않은 죄, 그리고 아빠 차로 딸의 운전연습을 시켜주지 못한 죄'를 붙여 조용히 아버지를 다시 차 안으로 모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