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하달하 Apr 22. 2017

엄마의 가정연락부

일하는 엄마를 위한 딸의 편지

우리 집 현대반점은 한 달에 딱 2일만 쉬는 매우 성실한 중화요리집이었다. 아침 10시부터 저녁 10시까지, 아니 설거지와 다음날 장사 준비까지 하면 12시가 다 되어서야 끝날 때도 있었으니, 우리 부모님은 눈을 뜨자마자 일을 시작해 잠이 들 때까지 일을 하신 것이나 다름없었다. 우리 집은 가게 바로 옆 골목 안에 있었지만, 어릴 적 나는 하루 종일 아빠 엄마가 집에 오기를 기다리며, 주문을 외우듯 '보고 싶어요'를 연습장 가득 써 내려갔다.


어느 날 저녁식사 후 과일을 먹고 있던 내게, 엄마가 잘 정리된 종이 뭉텅이 하나를 가져오셨다. 얼핏 편지인가 하고 살펴본 종이에는 또박또박 '엄마 가정연락부'라고 적힌 종이가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엄마는 그 종이뭉치가 '엄마의 보물'이라시며,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엄마에게 숙제 검사를 해달라고 적어둔 쪽지들이라고 하셨다.


엄마께 은지가

확인학습자료 정답이면 1차에 찍고 가위면 찍지 마세요
완전학습은 7과라고 위에 써있스면 그것만 검사 맛으세요
예체능 문제집은 39쪽에서 44쪽까지 검사 맛아 주세요
엄마가 할 일은 끝났어요
사랑해요 엄마 아빠두 사랑해요
엄마 안녕히 주무세요
엄마 안녕? 굿빠이

엄마의 가정연락부
엄마 가정연락부

엄마께 은지가

엄마 배움중간고사는 1장만 매겨요
그리고 완전학습은 산수 48쪽 매겨요
또 확인학습자료는 2장 도장 찍어요
그리고 읽기 읽었어요 (2번읽기)써조요
엄마 오늘은 엄마가 매길 것 쓰것 많이 없어요 참 좋쵸
매일마다 사랑한다고 쓰는 것 좋아요 매일마다 한께요
사랑해요 좋쵸
가방정리하고 잠자요
엄마나 12줄 쓰라 그러다가 쓰 글씨가 있었어 많이 써야 겠어요
안녕히 주무세요
글씨를 못써도 알수 있겠죠
안녕 이상 은지가
장간 일기 잘 써는지 바조요
알겠죠
나는 잘자요 참 아빠두 잘자요
아빠도 사랑해요 여기 날짜써요
엄마 가정연락부

엄마께 은지가

엄마 일기존 바주세요
그리고 완전학습은 즐거운 생활 79~84쪽까지 매기구요
배움 중간고사 7~14쪽까지 매기세요
확인학습 다 찍으세요
오늘은 다른 것도 두 세개 존 박게 안되요
엄마 아빠 사랑해요 아주아주 사랑해요
엄마 아빠도 그렇츄어 매일매일 엄마 아빠한테 쓰 말을 생각하고 있었요
오늘도 생각해요 지금 이게 생각하면 쓰는거에요
엄마 내가 이 글씨를 잘 써다는지 좋다든지 않좋다든지 이런 것 아침에 물어 본게 대답해줘

(참 잘했어요 - from 엄마)
엄마 가정연락부

엄마께 은지가

매길 것은요 배움산수 82쪽가지 매김는거예요
엄마 이재 매길 것 없어요
엄마는 할 일이 많이 없으니까 좋게다
나는 않그래 공부도 11월 1일이 시학력고사를 치는 날이기 때문에 그래요
엄마 아빠 사랑해요
엄마 안녕
엄마 가정연락부

엄마께 은지가

엄마 오늘은 매길거 없어
그래도 가정연락부는 써야겠드라
않쓰면 마음이 않좋아
글씨를 짜께 쓰는거야
그런데 일요일에는 놀았쓰면 좋게서
매일마다 일하는 것도 실차나
엄마 이제 실망이 많이 없어
엄마 아빠 사랑해요


마지막 가정연락부를 읽고 나서는 코끝이 찡해졌다. '아, 그랬지. 나는 매일매일 엄마 아빠가 보고 싶었지.' 잊혀진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항상 조용하던 집에 덩그러니 남겨져있던 내 모습이 그려졌다. 그리고 저녁마다 내가 써 놓은 가정연락부를 읽고, 잠이 든 내 얼굴을 바라봤을 엄마가 떠올랐다. 분명 나보다 더 큰 그리움을 느낀 건 우리 엄마였을테니까. 다른 가정연락부들과는 다르게 여기저기 썼다 지워진 엄마의 글씨를 보며, 그 시절 우리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새삼 궁금해졌다.


엄마는 오빠와 내가 알아서 컸다고 말씀하시곤 한다. 크게 손이 간 적도 없고, 말썽을 피운 적도 없이 잘 커줬다고. 하지만 나는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틈에도 아침식사와 점심 도시락을 한 번도 빼놓지 않고 준비해주셨던 엄마를, 우리 학비 대느라 비가 오든 눈이 오든 꾸준히 가게 문을 열던 엄마와 아빠를 기억한다. 그리고 한 달에 두 번이던 엄마의 휴일이 온전히 오빠와 나를 위한 시간이었음을 잊지 않고 있다. 많은 시간을 같이 있어주지는 못했지만, 나는 우리 엄마의 사랑이 다른 누군가의 사랑보다 작지 않음을 너무나 잘 안다.


나는 바쁜 엄마 아빠 덕분에 또래 아이들보다 혼자서 해내는 법을 더 일찍 배웠고, 글로 사랑을 전하는 법을 스스로 깨우쳤다. 그리고 내 가정연락부를 날짜까지 적어가며 소중히 간직하던 엄마를 보며, 바쁜 하루 중에서도 엄마가 나를 잊지 않고 챙겨주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마다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은 모두 다른 법이니까, 내게는 엄마의 소박한 사랑방식이 무엇보다 소중하고 자랑스러웠음을 엄마가 꼭 알아주셨으면 좋겠다.

이전 06화 아빠 차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