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하달하 Sep 24. 2016

아빠와 배달통

엄마 아빠,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뜨거운 여름날이었다. 중학생이던 나는 아침 조회를 준비하기 위해 체육복으로 갈아입으려던 참이었다. 사물함으로 다가가며, '아차'. 사물함 열쇠를 집에 두고 온 것이 생각났다. 이미 조회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고, 집에 들렀다 오기에는 턱 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부랴부랴 집에 전화를 걸어 어머니께 열쇠를 가져와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몇 분 뒤, 부릉부릉 오토바이 소리와 함께 '박은지'하며 크게 부르는 어느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였다. 흐릿한 기억 속 아빠는 반바지에 반팔 티셔츠를 입고, 노란 바구니를 매단 오토바이에 반 즈음 걸터앉아 있었다. 전교생이 창문 밖을 내다보던 그 순간, 아빠는 더 크게 '박은지-'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차차'. 엄마가 오기를 바랬는데, 아빠가, 그것도 배달통을 들고 오토바이를 타고 오시다니. 아빠는 내가 몇 학년 몇 반 인지를 몰라 무작정 운동장 한가운데서 내 이름을 불렀다고 했다. '아차차차'.


나는 어릴 적부터 소풍날이나 운동회날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엄마 아빠가 학교로 와야 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근처에 있던 우리 부모님의 직장, 현대반점은 맛있기로 유명해 학교의 행사가 있는 날이면 평소보다 더 붐볐다. 그래서 소풍이나 운동회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면, 언제나 평소보다 더 많은 양의 설거지 감이 밀려있었다. 엄마 말씀에 의하면, 나는 막내에다 딸이라 오빠보다 설거지를 많이 하지 않았다시지만, 그럼에도 내 기억 속에는 큰 고무대야 속 가득한 그릇들과 껍질이 벗겨지기만을 기다리던 양파 무더기가 선명히 남아 있다. 그중 다행인 것은 내가 짜장면을 매우 좋아하는 아이였다는 것이고, 불행이라면 나는 아직까지도 이미 사라져 버린 현대반점의 짜장면 만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맛있다는 중국집에 가서 먹어도, 엄마 아빠가 내주시던 따끈하고 달달한 그 짜장면의 맛은 찾을 수가 없다.


내가 우리 집이 짜장면 집이라는 것을 창피해했는지에 대한 기억은 자세히 나지 않는다. 다만, 부모님이 항상 바쁘고 휴일도 없이 일하는 것에 언제나 아쉬움을 느꼈던 것만 기억이 난다. 학교를 마치고 가게에 들러 '학교 다녀왔습니다'를 외쳐도, 부모님에게는 밀린 주문이 먼저였다. 내가 미주알고주알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엄마 아빠가 더 바빠질 것을 알아서, 언제나 '집에 갈게요'하고 문 밖을 나섰다. 그리고 열 시가 다 되어 아버지의 배달통이 말끔히 비워지고 깨끗이 닦일 때 즈음이면, 비로소 엄마에게 다가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쏟아낼 수 있었다. 그마저도 여의치 않은 날이면, 공책을 찢어 또박또박 내 숙제며 내일 준비물이며 필요한 말만 적어두고, '사랑해요'라는 말을 남긴 채 혼자 잠에 들었다.


엄마 따라 쫄래쫄래 올라가던 현대반점 옥상. 엄마가 좋아하는 사진.


엄마는 내가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셨다.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요, 돈을 많이 버는 사람도 아니요, 그냥 훌륭한 사람. 엄마가 읽는 수많은 책에 나오는 멋진 여성 리더들처럼, 세상이 그어놓은 선에 머무르지 않고 원하는 것을 맘껏 펼쳐나가는 사람. 다만, 엄마도 나도 그런 사람이 어떻게 될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른 채, 그저 함께 그런 날이 오기를 꿈꾸며 살았던 것 같다. 그래서 엄마는 내가 포항에서 서울로 대학을 가겠다고 할 때도, 미국이며 일본이며 공부를 하러 떠나겠다고 했을 때도 언제나 나를 응원해 주셨다. 내가 대학생일 때 즈음, 엄마는 내가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엄마 아빠의 배경과 상관없이 좋은 사람을 만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하셨다고 했다.


나는 포항이라는 작은 도시에 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삶의 차이를 대학을 들어가고 나서야 실감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휴가를 맞춰 해마다 가족여행을 간다는 친구, 어느 회사의 오너 아들이라는 강의실 옆자리의 학생, 서로의 사는 동네로 빈부의 차이를 가늠하던 서울 아이들. 내게는 이 모든 게 생소한 충격이었고, 너무나 먼 이야기라 부러움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외국에서 만난 친구들은 더욱더 대단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었고, 회사 생활을 시작한 후에도 새로운 세상은 끊임없이 펼쳐졌다. 어느샌가 나에게는 '부모님이 보여준 세상'과 '내가 만난 세상'이라는 두 가지 세계가 존재하게 되었다. 그 괴리가 커질수록 나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이 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꽤나 큰 외국계 회사에서 일했던 나는, 아름다운 한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높다란 빌딩 속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냈다. 벽면을 둘러싼 화이트보드에 열심히 도표를 그려가며 발표 준비를 하던 어느 날, 커다란 회의실 안에 앉아있는 나의 모습이 마치 드라마에서 보던 커리어우먼의 모습인 것 같아 혼자 뿌듯했던 적도 있다. 그야말로 상상도 못 한 그림이 내 앞에 펼쳐져 있는 기분이었다. 고향집에 갈 때마다 나는 한 단계씩 성장했고, 그만큼 엄마는 더 뿌듯해하셨다. 그럼에도 엄마는 내가 남자 친구 얘기나, 미래의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언제나 말없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하셨다. 아마도 결혼이라는 순간에, 엄마 아빠가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염려하고 계셨던 것 같다.


번쩍번쩍한 유리 빌딩 속에서 일을 한다고 '더 나은'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느 날 오빠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이런 주제가 나왔다. 오빠도 나도 그럴듯하게 차려입고 책상 앞에 앉아 몸 대신 머리를 굴려하며 일하고 있지만, 가끔은 땀 흘려 일하고 성실하게 벌어 우리를 먹여 살리셨던 부모님의 일이 더 가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고. 좋은 곳에서 일한다고 다 좋은 일만 하는 것은 아니니까. 사회 초년생이 되어 바라본 큰 세상 속에는 좋은 것도 그렇지 않은 것도 많이 있었으니까.


아빠는 어딜보시나. 오빠는 삐졌나. 내 치마 좀 내려주지. 엄마만 카메라를 보고 있는 사진.

부모님의 오랜 염려를 먼저 깨버린 사람은 바로 우리 오빠였다. 서울깍쟁이 같은 스타일을 좋아하던 우리 오빠가 행여나 너무 콧대 높은 사람을 데려오면 어쩌나, 그 집에서 우리를 안 좋게 보면 어쩌나 노심초사하시던 부모님의 걱정이 무색하게, 어디서 구했는지 너무나도 참하고 싹싹한 여자 친구를 신붓감이라며 데리고 온 것이다. 거기다 사돈 어르신들도 시원시원하셔서, 결혼 후에도 종종 술자리를 할 만큼 부모님과 좋은 관계를 만들어가고 계신다. 언제나 멀리 있는데도 챙겨주지 못해 오빠에게 미안하다던 엄마 대신, 사위를 끔찍이 이뻐하시는 오빠의 장모님께서는 이것저것 맛있는 것도 챙겨주시고 혼자 살던 나에게까지 김장 김치를 담가주실 만큼 마음이 따뜻한 분인지라, 부모님께서는 큰 고비를 넘긴 듯 오빠 결혼 후 한층 행복하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


'은지 너는 살림은 잘 못하니까, 열심히 돈 벌어서 일하는 아주머니를 모셔'라는 엄마의 말을 우습게만 듣던 나도 어느새 결혼을 했다. 그것도 엄마 아빠랑 말이 안 통하는 독일 총각과. 처음 외국인 남자 친구가 있다고 했을 때, 엄마는 '니가 외국을 나갈 때부터,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며 담담한 표정으로 나를 놀라게 하셨다. 운 좋게도 살림 잘하는 신랑을 만나 맨날 어지르기만 하는 나를 잘 도와주고,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시는 시부모님이 계셔 엄마는 항상 감사하다고 말씀하신다. 이로써 부모님이 걱정하던 큰 고비는 모두 넘긴 셈이다. 앞으로도 엄마 아빠는 끊임없이 오빠와 나의 앞날을 걱정하시겠지만, 예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부모님의 인생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이미 두 분의 온 삶으로 우리에게 훌륭한 사람이 되는 길을 알려주셨고, 우리는 그런 부모님이 자랑스럽기 때문이다.

이전 04화 오빠가 밉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