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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하달하 Oct 22. 2016

엄마가 웃는다

이제 엄마 인생에 달콤한 초콜릿만 가득하기를.

2016년 음력 9월 10일, 엄마의 환갑 생일날. 나는 엄마 몰래 한국행 비행기를 타기로 결심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보다 좋은 선물은 없을 것 같았다. 10월 초부터 꽤나 기다리던 중요한 프로젝트가 시작이 돼, 회사에 어떻게 말해야 할까 망설였지만, '엄마의 60번째 생일이에요, 너무 중요해서 이번 휴가는 바꿀 수가 없을 것 같아요.'하고 매니저들에게 나답지 않은 강수를 날렸다. 마크 말로는 여기서는 흔한 일이라지만, 한국인의 정서가 가득한 나에게 이런 말을 내뱉기까지는 나름 긴 고민의 시간이 필요했다. 어쨌든 나는 엄마 몰래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오빠가 운전하는 차로 새언니, 그리고 조카 지우와 함께 금요일 저녁 포항으로 향했다. 내가 갈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하고 계실 엄마를 생각하니 개구진 웃음이 입가를 떠나질 않았다. 차가 많이 밀려 새벽 두 시가 다 되어서야 도착한 포항집. 일층으로 내려오는 엄마를 내가 먼저 마중 나갔다. '엄마야-'하고 비명을 지른 엄마는 꿈꾸는 사람처럼 멍한 눈을 하고서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리고는 독일 결혼식에서 나를 보고 그랬을 때처럼, 온몸이 아플 만큼 나를 꼭 안아주었다. '어떻게 왔어, 왜 왔어'라는 말만 되풀이하던 엄마는 꿈속에서 나를 만난 것 같다며,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하셨다.

독일 결혼식, 내가 사라져버릴까 무서워, 달아나지 못하게 꽉 껴안는 듯한 엄마의 모습. 울지마.

20살이 되어 서울로 대학을 갔을 때부터, 나는  엄마 곁을 떠나 살았다. 엄마는 술에 취한 아빠를 떠나 자식들이 훨훨 자신들의 삶을 찾아갔으면 좋겠다고 말했지만, 가까운 곳에 자식을 끼고 매일 얼굴을 보며 사는 친구들을 보며 가끔 부러움을 느끼셨단다. 한 번도 제대로 된 사랑을 해 본 적이 없어 사무치는 그리움이 무엇인지 몰랐는데, 나를 서울로 보내고 나서야 가슴이 시리도록 보고 싶은 게 어떤 느낌인지 처음 알게 되셨다고 한다. 그런 엄마가 나를 독일이라는 먼 나라로 시집을 보냈으니, 얼마나 더 내가 보고 싶으셨을까.


미국 교환학생 시절, 오랜만에 집으로 건 나의 전화에 엄마는 '무소식이 희소식이지, 잘 있으면 됐어'라며 무심히 전화를 아버지께 돌리셨다. 거기다 아버지는 '서울에 있으나 워싱턴에 있으나 똑같네 뭐'라며 전화비 많이 나오니 얼른 수화기를 내려놓으라 하셨다. 어린 나는 정말 부모님이 그런 줄 알았다. 그래서 독일에 간다고 할 때도, '서울에 있을 때랑 똑같을 거야. 휴가가 기니까 더 자주 엄마 아빠 보러 올게.'라며, 되지도 않는 소리를 내뱉었다. 하지만 엄마 아빠는 한국에서 독일까지의 거리를 온전히 마음으로 느끼고 계신 듯했다. 휴가가 끝나고 인천공항으로 가는 KTX에 오를 때, 덤덤하게 손을 흔들던 두 분이, 몇 분이 지나고 기차가 잘 출발했다는 전화를 드리니 엉엉 우는 목소리로 대답조차 하지 못하셨기 때문이다. 매번 이러셨을까. 대학시절 내내,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태워 보내고서는 이렇게 몰래 눈물을 훔치셨을까.


독일 결혼식 전, 마크와 내게 써주신 엄마의 편지.

부모님은 딸의 결혼식을 위해 10시간을 날아 독일로 오셨다. 그리고 엄마의 손에는 미안함과 고마움을 가득 담은 편지가 들려있었다. 긴 비행을 경험해보고 나니, 이렇게 먼 거리를 서슴없이 날아왔던 마크가 얼마나 나를 사랑했는지 느낄 수 있으셨다고 했다. 또 엄마는 내가 독일 여행 중에, '여기 오니 편안하고 행복해'라고 보낸 문자를 보고 언젠가는 내가 떠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셨단다. 어쩌면 내가 마음을 정하지 못했을 때부터, 엄마는 이미 마음의 준비를 시작하고 계셨는지도 모르겠다.


담담하게 써내려간 엄마의 편지를 보자, 행간에 숨겨진 엄마의 마음이 보이는 것 같아 가슴이 시렸다. 이 편지를 쓰면서 엄마 마음은 얼마나 더 아팠을까. 내가 수 백번 괜찮다 말해도 엄마는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하는데, 언제 즈음이면 '미안하다'는 말 대신 '행복하다'는 말만 들을 수 있을까. 엄마가 나를 잘 키워줘서 좋은 데서 공부도 하고 좋은 친구도 만나 결혼도 하게 된 것인데, 엄마는 도대체 뭐가 그렇게 미안하다는 건지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엄마 아빠랑 매일매일 독일여행, 맑은 날씨만큼이나 티없이 행복했던 시간.


변덕스러운 독일의 날씨도 엄마 아빠를 반기듯, 두 분이 머무르던 열흘 내내 우리는 맑고 따스한 날씨를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날씨만큼이나 부모님의 표정도 너무나 밝았다. 엄마가 좋아하는 오래된 성당들도 가보고, 아빠가 좋아하는 맥주도 매일 마셨다. 대단한 여행을 하진 않았지만, 낮에는 작은 동네를 마음껏 휘젓고 다니고, 저녁이면 집에서 오손도손 밥도 해 먹고 베란다에서 해 질 녘 노을을 함께 즐겼다. 생각해보니, 어른이 되고 그렇게 오랫동안 엄마 아빠와 함께 지낸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사위까지 모여 긴 시간을 함께 보내고 나니 멀리 시집온다는 슬픔보다는 행복한 추억을 만들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엄마는 환한 웃음으로 '행복하다'라고 하셨다. 마크도, 마크의 가족도, 그리고 친구들도 모두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주고 아껴주는 모습을 가까이 서보니 더 바랄게 없다셨다. 엄마의 딸이 원래 이 나라에 살던 사람처럼 한없이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보였단다. 엄마는 특히 이 곳에서 시간을 함께 보내며, 마크의 진가를 본 것 같아 좋다고 하셨다. 좁디좁은 오래된 차, 매일 출근하는 사람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빈약한 옷장, 그럼에도 부모님의 비행기표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던 마크. 천방지축인 내가 마구 실수를 저지르고 다녀도, 화내기보다는 괜찮다며 나를 다독여주는 마크. 엄마는 한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마크의 매력에 푹 빠지셨던 것 같다. 그 대신 엄마는 내게 잔소리가 늘어, 전화를 할 때마다 '너도 마크한테 좀 잘해'라는 말을 잊지 않으신다.


한국 결혼식, 오랜만에 본 엄마의 평화로운 미소, 앞으로는 평생 이런 미소만 짓게 해 드릴게요.

엄마의 지난 60년은 참으로 고달팠다. 괴팍한 아버지 비위 맞추랴, 아들 딸 공부시키고 시집 장가보내랴, 엄마 본인은 언제나 뒷전이었다. 지금이라도 엄마가 이기적으로 행복해졌으면 좋겠지만, 엄마는 그 방법을 이미 다 잊어버린 듯하다. 지금도 아빠 걱정, 오빠와 내 걱정에 엄마 자신은 돌보지도 않는다. 내 월급을 몽땅 드려서라도 더 이상 힘들게 일을 안 하셨으면 좋겠고, 빚을 내서라도 큰 집에서 편안하게 사셨으면 좋겠는데 엄마는 그게 행복이 아니란다. 오빠가 새언니랑 지우랑 행복하게 사는 것, 내가 마크랑 아들 딸 쑥쑥 낳고 행복하게 사는 것을 보는 게 가장 큰 행복이시고 유일한 바람이시란다. 고리타분하지만, 그것이 엄마가 원하는 것이라면 나는 얼마든지 더 행복할 수 있다. 내가 할 수만 있다면 세상 끝까지 행복해져서, 앞으로 펼쳐질 엄마의 60년이 지금까지의 고단한 삶을 모두 잊혀지게 할 만큼 밝고 따뜻하기만 했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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