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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하달하 Sep 23. 2016

아빠가 운다

그렇게 아이 같은 얼굴을 하고서, 하염없이 엉엉 운다.

우리 아빠는 거친 사람이었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보다, 우락부락한 표정으로 강렬한 눈빛을 보내던 아빠의 얼굴이 내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 가득하다. 언제나 술 취해 얼굴이 붉으락했고, 가끔 기분이 좋으면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에서부터 '아빠하고 은지하고 만든 꽃밭에'로 시작하던, 이상한 동요를 지어 부르던 우리 아빠. 그런 아빠가 운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면 우리 집은 TV에 나올법한, 불우한 환경의 가정이었다. 어릴 적 집을 나온 아버지는 친구들이 교복을 입고 학교를 다니던 그 무렵부터 철가방을 들고 짜장면 배달을 하셨다. 어느 드라마 속 주인공이나 겪었을 험한 세상살이 속에서 아버지는 중국집 사장님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철부지 어린 시절부터 시작한 노동은 내가 초등학생이 될 무렵부터 아버지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고, 아버지는 그 무게를 술로 견뎌냈다. 내 어릴 적 기억 속에는, 술 취해 잠이든 아빠의 코에 손가락을 대고 숨을 쉬는지 확인하던 내 모습이 있다. 그렇게 아버지는 목숨이 아깝지 않은 듯 매일 술을 드셨다.

독일 결혼식 피로연, 신랑 형님이 찍어주신 사진. 엄마는 귀엽고, 아빠는 콧수염이 너무나 잘어울려 우스운 사진.


엄마도 오빠도, 그리고 나에게도 아버지는 마음속 '슬픔'과 '아픔'이라는 단어로 새겨진 사람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 셋 중에서는 내가 제일 아버지를 좋아했던 것 같다. 아버지의 무서운 모습을 가장 적게 본 사람이요, 아버지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엄마의 교육을 가장 철저히 따른 사람이 나였으니까. 엄마는 자신 인생에서 가장 미운 사람이었을 아빠를, 딸인 나는 꼭 사랑해야만 한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외로워 보이던 아빠 옆에서 아빠의 술 냄새를 맡으며 컸다.


스무살이 된 나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 들어갔다. 하나뿐인 딸을 타지에 보낸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큰 그리움을 경험하셨다고 했다. 매 순간 내가 너무 그리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고 했다. 못난 딸은 큰 세상으로 나왔다는 즐거움에 설레기만 했는데, 엄마는 그렇게 매일 눈물을 흘리셨다고 한다. 종종 집으로 전화를 걸면, 언제나 그렇듯 엄마보다 덜 바쁜 아버지가 전화를 받아 '엄마 바꿔줄까' 혹은 '엄마 바꿔줄게'라는 말을 남기고는 전화기 너머로 사라지셨다. 이러다가는 아버지와 평생 제대로 통화 한 번 못 하겠다 싶어, 어느 날 '잠깐만'을 외친 후 아버지를 전화기 앞에 붙들었다. 그 후 할 말이 없다는 아빠에게 날씨 얘기며 서울 교통 얘기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한 번에 1초씩 대화 시간을 늘려갔고, 10년이 지난 지금은 넉넉히 3분 정도는 전화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거기다 한 술 더 보태,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 전에는 전화를 끊지 않으니, 아빠에게는 내 전화가 고역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어느 아버지나 그렇듯, 우리 아빠도 나이가 들면서 이빨 빠진 호랑이 신세가 되었다. 엄마에게도 오빠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으르렁' 소리 한 번 못 내는 호랑이. 심지어 머리숱까지 적어진 우리 아빠는, 잘생겼다 자랑하던 당신의 외모가 사라져 버려 더욱 기력이 없다. 그래서인지 더 이상 몸에서 받아주지 않는 술은 줄어들었고, 대신 '미안하다'는 말만 늘어난 우리 아빠. 내가 장학금을 받고, 교환학생을 가고, 첫 회사에 들어갈 때도, 아빠는 장하다는 말 대신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내가 잘되면 잘 될수록 아빠는 더 미안해졌나 보다. 직장인이 되어 아버지 생신에 편지를 부친 적이 있는데, 난생처음 아버지께 받은 답장은 그 미안하다는 말보다도 나의 심장을 더 크게 때리는 듯했다. '아빠하고 은지하고 만든 꽃밭에...'로 시작하던, 눈물자국 가득한 그 편지. 아빠는 그 노래 말고는 내 어릴 적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그렇게 아빠는 해 준 게 없어 미안하다고 했다.


나의 첫번째 결혼식, 아빠가 아이처럼 울던 그 날.


직장인 3년 차가 되던 해, 여느 때처럼 야근을 하던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생각났다. 나는 고작 3년 일하고도 이렇게 힘든데, 우리 아빠는 몇십 년이라는 세월 동안 얼마나 그만두고 싶은 적이 많았을까. 책가방 대신 철가방을 메고, 포항 금싸라기 땅에 중국집을 열고 가정을 꾸리기까지 얼마나 힘들고 도망가고 싶었던 적이 많았을까. 그날 저녁 퇴근길, 빌딩 숲이 빼곡한 삼성동 골목에서 수레에 폐지를 싣고 가는 꼬부랑 할아버지를 만났다. 추운 날씨에 고개도 못 들고 무거운 걸음을 옮기는 할아버지를 보며, 술독에 빠져 살던 아빠가 우리 가족을 떠났더라면 지금 저 할아버지가 우리 아빠의 모습일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했다. 힘든 세월 속에서도 가족이라는 끈을 놓지 않아준 아버지께 새삼 고마움을 느꼈다.


아버지가 술을 줄이고 지나간 일들을 되돌아보며 살게 된 데에는 분명 어머니의 몫이 크다. 미워도 아빠를 버리지 않았고, 힘들어도 오빠와 나를 남겨두고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아빠의 마음을 짐작해보기 시작했다. 마취된 사람처럼 술에 취해 살던 그때를 지나, 온전하게 맑은 정신으로 자신의 지난날을 돌이켜보는 아빠의 마음이 어떨까. 이제는 잘해주고 싶어도 곁에 없는 자식들을 보며, 아빠는 어떤 생각을 하실까.


나의 두번째 결혼식, 이미 아빠가 울 것임을 알았기에 웃음으로 눈물을 막아보려 했던 나.


교환학생 시절 만난 건실한 독일 청년과 결혼한 나는 지금 독일에 있다. 나의 첫 번째 결혼식을 참석하기 위해 독일로 날아온 아빠는, 엄마도 울지 않은 내 결혼식에서 가장 먼저 눈물을 터뜨렸다. 너무 아이처럼 엉엉 울어서 옆에 있던 시부모님도, 그리고 함께 했던 친구들도 모두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나는 왜 우셨냐고 묻지 않았다. 아버지는 낯선 나라에서 날아온 사윗감을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는 진부한 말로 받아주셨고, 말도 통하지 않는 독일 가족들과 유쾌한 손짓 발짓으로 친구가 되셨다. 아빠는 이미 나에게 큰 선물을 주셨는데, 아빠는 그것도 모르고 엉엉 우셨다.


아빠는 모른다. 아빠가 나에게 어떤 선물을 해줬는지. 나는 투박한 아빠 덕분에 어릴 적부터 무뚝뚝하고 다소 모난 친구들과도 잘 어울린다. 혼자서 우두커니 앉아있는 아이에게 먼저 다가가 친구가 되는 일은 내게 누워서 떡먹기보다 쉽다. 그 친구들이 감정 표현을 하지 않아도 나는 그 속마음을 잘 읽는다. 그래서인지 내게는 겉보다 속이 진국인 친구들이 많다. 나의 신랑 또한 그런 친구 중 한 명이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읜 나의 남편은 언제나 차가워보이는 친구였다. 철저히 이성적이기만 하던 이 친구가 독일에서부터 8000km를 날아 나를 자꾸 찾아오기는 하는데, 내게 좋다는 표현을 안 하니 무슨 마음으로 내게 이러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시간이 지나 알게 되었지만, 어릴 적의 아픔이 너무 커서 감정을 보이면 약한 사람이 될까 꼭꼭 숨기고 산 것이 습관이 돼버렸다고 했다. 꼭 우리 아빠 같았다. 이렇게 착하고 따뜻한 친구인데, 이 친구의 마음을 열어주는 사람이 여태껏 없었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그 사람이 내가 되었다는 것이 감사하기도 했다. 엄마는 내게 아빠 같은 사람은 절대 만나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백만 배 업그레이드된 버전의 아빠 같은 청년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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